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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13

복수는 나의 것 13





1년 후.



캐시 베넷이 아케이드 개넌과 함께 자이온으로 돌아온 것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베가스의 구세주이자 영웅이 된 그녀가 1년 만에 다시 자이온으로, 그것도 의사를 데리고 올 줄 예측한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캐시. 지금 백만 스물 두 번째로 말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이게 진짜 좋은 생각일까?”


“아케이드. 조용히 해. NCR도 네가 여기서 지내는 이상 간섭 안 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이게 최선의 수라고. 내가 얼마나 그 협상안을 끌어내기 위해서 노력한 줄 알아? 그리고 여기 사람들이 얼마나 착하고 좋은데. 네 까탈스러운 성미에도 쏙 들 거야.”


“……..됐다…됐어….그럼 그렇지. 내가 무슨 선택권이 있겠습니까? ”


아케이드는 툴툴거리면서도 배달부의 배려가 고마운 눈치였다. 쑥스러움이 그의 귓가를 붉혔다.


NCR이 베가스의 패권을 쥐게 되자, 난처해진 아케이드의 신변을 보호해준 건 배달부였다. 그녀는 무어대령과 장장 두 시간에 걸친 지리한 협상-이라기 보다는 고성이 오고 가는 살벌한 현장이었지만-끝에 아케이드를 모하비에서 떠나 보내는 조건으로 그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배달부는 아케이드가 낯선 곳에 정착하는걸 돕는다는 명분으로 다시 자이온으로 향했다. 적색의 웅장한 거암들이 몇 백 미터나 높게 치솟아 있는 곳, 하늘이 푸르고, 물은 투명해서 구 시대의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곳. 그녀는 자이온이라는 천해의 땅에 애착을 넘어선 존경심마저 느꼈다. 그런 그녀가 그 곳을 오랫동안-1년이면 황무지 기준에서는 모든 것이 뒤바뀔 수 있는 시간이었다- 방문하지 않았던 데에는 나름의 변명에 가까운 이유가 있었다.




“배달부, 묻겠다. 인간의 본성이 정녕 바뀔 거라 생각하는가? 그건 너의 오만이 아니냐는 말이다. 황무지를 바꿔보겠다는 내 이상과, 한 인간의 운명을 바꿔보겠다는 너의 이상이 얼마나 다른 거지?”




율리시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공멸과 공존은 왈츠를 추는 커플처럼 어울렸다. 서로 뺨과 뺨을 부드럽게 맞대고 발끝을 같은 방향으로 한 채, 끝나지 않는 윤무를 추는 두 사람. 한 박자라도 놓치면 그 순간 우아한 스텝은 엉키고 춤은 끝난다. 파멸이다. 배달부는 자신의 오만함을 또 다른 배달부 앞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의 주사위 놀이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율리시스인가, 조슈아 그레이엄인가, 아니면 자신인가.

그러나 신의 놀이를 한다기에는, 그녀에게 주어진 세상에는 신이 사멸한지 오래였다. 그 자리를 참칭하는 거짓된 광대들은 차고 넘쳤지만. 하우스, 시저, 아론 킴볼… 모든 도덕과 권위가 무너져 내려버린 세상은 그런 광대들의 장기자랑 무대로 전락했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은 그 무대의 소도구로 사용된 다음 손쉽게 버려졌다. 


하지만 그녀가 그 규칙을 바꿨다. 배달부는 손수 광대들을 치운 다음 조명을 끄고 무대의 막을 내렸다. 

그렇다고 그녀는 자신이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구세주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모든 끔찍한 문제들은 그대로였다. 황무지는 불결했고, 사람들은 죽어나갔으며 세상의 어딘가에는 착취 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숱하게 존재했다. 어떻게 노력해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생각했다, 뉴 베가스에서 자신이 한 일이 어딘가의 누구에게는 증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누군가의 도박판의 카드에 지나지 않는 존재도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증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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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부, 아니 ,, 캐시! 캐시!”


“아케이드..또 왜… 나 잠 좀 자자..”


“내가 여기 도착한 이후로 줄곧 말파-아니, 조슈아 그레이엄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고,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소름 돋아 죽겠어..차분한 사람이라며!  ”


“……….조슈아는 모두에게 다 그래. 사람이 붕대에 감겨있고 화상 좀 입었다고 그렇게 호들갑 떨지 좀 마. 모름지기 문명인이라면-“


“그.런.게.아.니.야! 캐시, 네가 어떻게 해명이라도 안 하면 난 다음날 싸늘한 주검이 되어서 저 냇물에 떠내려가는 신세가 될 거라고….! 냇물이 깨끗해서 구울은 안되겠지만-”


“………..무슨 해명을………아………………………”


깊은 수마에서 완전히 벗어난 캐시가 그제서야 호탕하게 웃었다. 그녀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야, 캐시. 조용히..!”


타닥.


그러나 아케이드가 캐시의 입을 막기도 전에 발소리가 들렸다. 둘이 고개를 돌리자, 조슈아 그레이엄이 입구 초입에서 라디오 같은 물건을 들고 서 있었다. 그의 창백한 눈은 캐시와 아케이드를 훑더니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듯이 둘 사이의 허공을 응시했다. 결국 갈피를 찾지 못한 눈길은 천장에 고정된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캐시. 내가 때를 잘못 찾았군. 다음에 내 방으로 오게. 발견한 물건이 있으니.”


조슈아 그레이엄이 -엉켜있는 둘의 모습을 단단히 오해한 게 분명한 듯이- 동굴을 떠나자 아케이드는 진심으로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음산하게 읊조렸다.

“ Sors est saeva…..나 당장 뉴베가스로 떠나는 짐을 싸야겠어. 지금 바로. NCR의 감옥이 여기보다 편할 것같군.”


“………….아케이드. 내가 직접 해명할게.”




캐시는 한숨을 쉬면서 겉옷을 챙겨 입었다. 아케이드 개넌과 자신이 어떻게 저떻게 그런 요상한관계가 되는 건 데쓰클로가 라틴어로 모르몬 성가를 부르는 것보다 낮은 확률이란 걸…. 저 눈치없는 남자에게 어떻게 이해시킬지 고심하면서 말이다.








“-조슈아…”


“………….”


“조슈아, 안자고 있는 거 알아요. 당신 자는 연기 진짜 못하는 거 알아요?”


“…………………………………………….”


조슈아가 계속해서 침묵하자, 캐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뭐, 남자가 서운할 법도 했다. 1년 동안 코뺴기도 비치지 않은데다가, 자이온으로 오자마자 반나절 동안 골아 떨어져 있었던 주제에 의사 양반하고만 떠들고 있었으니.


캐시가 남자의 귀-로 추정되는 부분-에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요. 정말.”


우습게도 남자는 이런 종류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술책에 넘어갔다. 항상 그랬다. 남자는 자신에게 허무할 정도로 약하게 굴었다. 조슈아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캐시는 환하게 웃었다.


“그게 정말인가.”


“네?”





정말 보고 싶었냐고요?

캐시는 대답 대신 손가락 끝으로 그의 입가를 매만졌다. 붕대의 감촉 너머로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었던 자리-을 훑었다.



제가 당신을 두고 어디갈까요?


당신과 나는 모두가 퇴장한 바로 그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거에요. 계속해서, 계속해서. 둘 중 하나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조슈아 그레이엄은 그녀의 속 마음을 간파하기라도 한 것처럼 캐시의 어깨를 끌어안고 여자의 목덜미에 자신의 고개를 파묻었다.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각자의 옷을 빠른 속도로 벗었다. 조슈아의 SWAT 조끼와 캐시의 잠옷이 같이 바닥에 떨어졌다. 캐시가 조슈아의 몸에 올라타자 남자가 웃었다. 여자는 그런 조슈아의 얼굴을 보지 못해서 무척이나 유감이었다. 하지만 눈빛으로도 충분했다. 캐시가 조슈아의 몸 위를 더듬자, 그가 낮게 신음했다. 괴로워서라기보다는 쾌락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에 그녀는 남자의 탄탄한 가슴쪽으로 손을 올렸고, 그의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확인했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까슬까슬한 붕대에 캐시의 피부가 가볍게 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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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가 끝나자 둘은 촛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후희를 즐겼다. 밖은 쌀쌀했지만 이불 안은 온기로 따뜻했다. 캐시는 남자의 쇄골 부근에 자신의 얼굴을 댔다. 따뜻한 체온과 동맥의 박동이 그녀를 차분하게 했다.



"생각해보니, 신기하네. 그 나이에도 아직 팔팔해요?"


"분위기 깨는 데는 천재적이군."


"아니,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이란게 이런-"


캐시의 시덥잖은 말장난은 조슈아의 키스로 무산되었고 그들은 서로 키득거리면서 코를 부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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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전쟁이 변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변해야 한다. 그들이 짊어진 상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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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부는 뉴 베가스의 구원자로 남았고, 그녀의 이름인 캐시 베넷은 뉴베가스가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남을 것이다. 그녀는 인공위성의 잔재를 찾았고, 그 잔재를 통해 새로운 위성을 쏘아올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



불탄 남자의 전설은 점차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졌다. 그 자리에는 조슈아 그레이엄의 이름이 새로 일어서게 되었다.



시저의 군단은 후버댐에서 패퇴한 후 세력이 급감했고, 내분 끝에 완전히 기울었다.


NCR은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부족민 출신 정치인이 다음 대선 출마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건라이트는 더 이상 군단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아케이드 개넌은 자이온에서 부족민들의 역사를 공부하는데 몰두한다. 그의 저술은 황무지에서 널리 퍼지게 된다.


베로니카 산탄젤로는 배달부의 설득 끝에 그녀의 인공위성 프로젝트에 동원(?)된다. 그녀는 행복해보인다.


렉스는 자신을 완전히 받아들였고, 프리사이드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지미 핸론은 레딩에서 목장을 운영한다. 그는 여전히 말이 많다. 


크레이그 부운은 저격대대에 재가입한 뒤, 자신만의 정의를 실현하는 중이다.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말이다.


분필 자국 따라는 종종 캐시를 따라 뉴베가스로 여행을 가곤 한다. 그는 여전히 자이온을 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전쟁은, 전쟁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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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12

복수는 나의 것 12

And me I am your dagger

You know I am your wound

I thought I heard you whisper

It happens all the time

She whispers while I'm sleeping:

"I love you when you smile"

I didn't really lose you

I just lost it for a while


캐시는 말파이스 군단장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사나운 은어를 섞어 쓰는 군단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자신만의 독특한 운율과 발음으로 말하는 남자도 좋았지만, 그가 가장 매력적일 때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투명하고 차가운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고, 엄격한 얼굴에 긴장감이 풀리고, 입이 열리기 직전의 몇 초간.  응답 하기 직전의 직전까지 숙고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그 찰나의 순간. 캐시는 그 순간의 말파이스 군단장이 좋았다.

우습게도 그녀는 아쉬워했던 것 같다.

군단장으로 남기에는 아까운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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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새벽에 잠을 설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 불면의 이유도 알고 있지만 끝까지 당신 앞에서 모르는 척하는데, 왜냐하면 정말 우습게도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를 가만히 쳐다보는 당신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렇게 당신은 나를 쳐다보다가 내 목에 손을 얹기도 한다. 조르듯이, 혹은 쓰다듬듯이. 나는 위협보다는 당신의 손이 마르고 차갑다는 데서 가슴의 통증을 느낀다.

내가 깨어있다는 것을 모르는 당신은 내 귀에 속삭인다. 실버 슈라우드의 에피소드들, 매그너스의 최후와, 우주정거장에 남겨진 채 유령이 되어버린 사람들, 끝없이 펼쳐진 황야의 슬픔, 나에 대한 사랑과 증오. 나는 당신이 들려주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전부 심장에 새기고, 그럴 때마다 피가 흐르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귓가에 느껴지는 당신의 숨결이 기껍다.

 “조슈아. 할 말이 있어.”

어느 날, 당신은 이곳을 떠나자고 한다.

당신의 목소리는 그 날 따라 유독 퍼석퍼석하고 거칠다. 당신은 우는 것을 억누르려는 듯이, 간신히 한 음절, 한 음절을 쥐어짜낸다.

“군단을 영영 떠나자. 서쪽이든, 동쪽이든……아니면 캐나다도 좋아. 사실 당신이 말했던 자이온이라는 곳도 생각해봤어. 방사능이 없는 천국이라고 그랬지? 가보고 싶어. 그거 알아, 조슈아 그레이엄? 당신에게는 아직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그저 당신이 겁을 내고 있을 뿐이야.”

당신은 내가 줄곧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 사실을 나도 깨닫는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뜨거운 물방울들이 내 볼로 떨어져, 그대로 베개를 적신다.

“비겁자. 나쁜 자식. ”

당신은 막사 밖으로 뛰쳐나가고, 나는 심장이 죄어져 오는 통증을 느낀다. 그것이 슬픔인지도 모르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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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그 부운이 노박의 공룡상에서 보초를 서고 있을 때, 그는 저 멀리서 배달부가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지평선 위의 검은 점처럼 작게 보였지만, 부운은 그것이 배달부임을 알고 있었다. 매우 간단히 말해, 그토록 당당하고 쓸쓸하게 걷는 사람은 황무지에서 그녀 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달을 등진 채, 모래바람을 뚫고 올곧게 직선으로 걸어오는 그녀를 보면서 부운은 때가 다시 왔음을 자연스럽게 예감했다. 그는 자신의 모자를 고쳐쓰고 노박을 떠날 준비를 했다. 


부운은 감이 좋은 편도 예지력이 뛰어난 편도 아니었지만 복수를 결심하는 사람의 모습만큼은 기민하게 알아차렸고, 그가 보기에 배달부는 타고난 복수자였다. 무엇을 위한 복수인지 그녀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그랬다. 자신의 혈관 안에 흐르는 검은 피가, 그녀의 혈관 속에도 흐르고 있었다. 그것만이 둘이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이유였다. 피의 맹세보다 강한 결속이었다. 


부운이 준비를 끝내고 노박의 게이트 앞에 선 배달부에게로 다가갔을 때, 그녀는 짝다리를 짚은 채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한 쪽에는 레인저 세쿼이아, 다른 한 쪽에는 독특하게 개조된 45구경 권총을 찬 채로 였다. 그녀의 핍보이에서 부운에게도 익숙한 쓸쓸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you told me love was too plebeian

told me you were through with me and

Now you say you love me

well, just to prove that you do

come on and cry, cry, cry me a river

cry me a river


“조슈아…라는 남자는 만났나.”

배달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슴푸레한 새벽의 풍광 속에서 그녀가 태우는 담배의 불만이 밝게 빛났다.


“죽였나.”


배달부가 고개를 저으면서 연기를 내뱉었다. 

퀴퀴한 어둠을 몰아내는,지평선을 타고 오르는 따뜻한 태양을 응시하면서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부운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고, 그들은 곧장 후버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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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배달부가, 아니 캐시 베넷이. 셀 수 없이 많은 군단병들을 도륙내고 그들의 피를 온몸에 뒤집어 쓴 채로 군단의 진지 한 가운데에 서 있다.  푸른 눈만이 붉은 피에 뒤덮힌 그녀의 얼굴에서 형형하게 빛난다.

지옥 속에서 곧장 걸어 나온 악마같은 모습에서 라니우스는 기묘하게도 불탄남자-말파이스-를 잠시 생각하지만 그는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를 비웃는다. 


말파이스는 자신을 이길 수 없었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하물며 '여자'는 더더욱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순리다. 


라니우스가 장광설을 늘어놓기도 전에 여자는 그의 허세 따위에는 관심 없다는듯이 조용히 자신의 말을 시작한다. 온 얼굴에 피가 뒤범벅인 채라 여자의 얼굴은 파악하기 어렵다. 목소리는 차분하고 조용하다. 아까 전의 살육으로 인한 흥분은 온데간데 없다.




"당신, 나 기억해?"

"너 따위 어릿광대를 내가 기억할 것 같나. 여자."

"당신이. 노예들을 전부 죽였잖아."



진군에 방해되는 물건들을 전부 치우라는 명령이라면 내린 적이 있었다. 어차피 곧 정복할 땅에서 새로운 노예들을 차출하면 그만인 것이었기 때문에, 낡고 못쓰게 된 기구들을 처분한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남자는 그것이 왜 그렇게 여자에게 중요한 일인지 모르겠고 그의 가면 너머로도 그런 몰이해가 손쉽게 드러난다.



캐시는 남자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웃는다. 그녀의 경쾌하기까지한 웃음소리에 괴물은 움츠러든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여자는, 괴물을 향해 달겨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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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NCR 레인저 본부다. 발신인은 응답하라."

"저...저는...캐시 베넷입니다. 지금 구조를 요청하러-"

연결이 끊겼다. NCR에서 일방적으로 끊은 것이었다.



그녀가 충격과 실망감으로 질려 막막하게 서있었을 때, 군단병이 그녀의 막사로 들이 닥쳤고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그녀는 깨달았다.




--------------------






배달부는 싸늘하게 식은 주검이 된 라니우스를 무심하게 지켜본다. 전투의 흥분과 스팀팩으로 인한 어지러움이 뒤늦게 모래 폭풍처럼 들이닥친다. 그녀는 잘게 비틀거리는 자신의 몸을 수그린 다음, 라니우스의 투구를 벗긴다. 놀랍게도 괴물의 형상이 아닌 평범한 남자의 얼굴이 있다. 그녀는 그 안면에 침을 뱉고 가면을 언덕 아래로 떨어뜨린다. 가면이 데굴데굴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누구를 위한 복수도 아니었다.

이 모든 일들은 매그너스를, 조슈아 그레이엄을, 나이젤을, 제레미를 위한 것이 아닌 오로지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그녀는 차게 시인한다. 그녀는 핍보이로 노래를 튼다. 시체들 위로 달겨드는 까마귀들과 진동하는 피 냄새 한가운데서 그녀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핍보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른다.


I don't want to set the world on fire

 I just want to start a flame in your heart

 In my heart I have but one desire

 And that one is you No other will do

나는 세상을 불태우고 싶지 않아요.

그저 당신의 마음 속에 불길을 놓고 싶을 뿐

내 마음에는 단 하나의 소망이 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에요. 다른 그 누구도 아닌.




2차 후버댐 전투는 다시 NCR의 승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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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동도 하지 않는 남자한테 다가가, 그의 붕대감긴 손을 쥐고 내 뺨 위로 가져다 댄다.



남자의 손은 어떤 이들에겐 두려울 정도로 크고 억세다. 마디가 굵고 손가락도 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손이 아름답다고 생각해왔다. 정확하게 할 일을 할 줄 아는 근육. 우아한 형태의 뼈대.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붕대에 감겨 잘 보이지 않는 그 아름다움을 촉각으로 느낀다. 조슈아의 손은 붕대 너머로도 뜨겁고, 난 그의 말(“내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더 강했기 때문에-“)을 진심으로 믿는다. 남자의 검은 엄지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내 눈가 밑을 만진다. 까슬까슬하다.




“날 증오하나요?”



“아니.”





남자의 손가락에 감겨있는 붕대가, 내 눈물로 젖는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일렁거리고, 그가 점차 내게로 다가온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뒤에 내 입술에 닿는 붕대의 꺼슬꺼슬한 감촉을 느낀다. 조슈아는 다른 손으로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는다. 우리는 그렇게 계속 서 있다. 내 눈물인지, 그의 것인지 모르지만, 조슈아의 붕대가 아주 조금 젖는다. 하지만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울지 못했다.




나는 그날 밤 그의 옆에서 잔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과, 살아있는 사람들, 앞으로 이 저주받고 축복받은 땅 위에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자기 전에 우리는 제레미 캐시디와 제레미 그레이엄을 위해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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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다리 부족 병사들을 하나 둘 상대하고, 그들의 캠프에 당도해서 상황을 정리한다. 소동이 일어나고, 나는 다급하게 외친다.


“조슈아. 멈춰요. 우리가 이겼어요. 다들 항복했다구요.”



조슈아의 손이 떨린다. 그는 부족장으로 향하는 총구를 거두지 않는다.



“조슈아!”



상처 위의 소금-나는 그 이름의 연원을 안다-이 부족어로 내게 말을 한다. 정확하게 알아 들을 순 없지만, 나는 그가 목숨을 구걸하고 있음을 파악한다. 무릎 꿇은 상처 위의 소금이 나에게로 기어오자 조슈아가 큰 소리로 외친다. 야수의 울부짖음 같이 자이온을 울린다.


“그대로 있어!”


“조슈아. 조슈아 그레이엄. 진정해.”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그가 조슈아 그레이엄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는 지금 말파이스 군단장이고, 불탄 남자이다. 허울 좋은 신의 가면이 벗겨지고, 그의 본 모습이 나온다. 나는 그 모습을 안다. 너무나 잘 알기에 더욱 차분하게 그를 설득하려고 노력한다.




“조슈아, 당신은 벌써 승리했어요. 둘러보라구요. 이놈을 죽일 필요는 없어요.”


“난 저 놈에게서 마땅히 받아내야 할 빚을 받으러 왔다. 그리고 저 놈은 우둔한 짐승마냥 벌벌 떨고 있지.”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당신의 믿음이 옳다면, 저 놈은 언젠간 죄값을 치르게 될 거에요. 슬픔 부족이 이런 것까지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심판의 도구가 아니에요. 모르겠어요? 용서하는 것도, 복수하는 것도 당신의 몫이 아니에요. 적어도. 당신은 아니에요. 당신의 손에 묻은 피의 무게를 정녕 모르겠어요? 그것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다시 잃고 싶어요? 무고한 사람들이 스러지는 걸 원해요? 그건 심판이 아니야. 말파이스, 당신의 또 다른 악업일 뿐이야. 그러니, 정신차려. ”


모두가 경악에 빠졌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 조슈아와 나만이 있는 것 같이 여겨졌다.

 


조슈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칠고 슬픈, 나를 눈물짓게 하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난 놈들이 내게서, 내 가족...내 아들에게서 빼앗은 것을 이 생에서 똑같이 빼앗고 싶다. 난 놈들이 고통받고, 공포와 고통 속에서 죽어버리길 원한다. 난 복수를 하고 싶다. 그리고 그 복수를 오롯이 내 행적이요, 신의 분노라고 부르고 싶다. “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방울 몇 개가 떨어지고 있었다. 공포와 긴장, 죽음과 분노가 가득한 공기 속에서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캐시, 너를, 네가 나를 죽여도. 너를 끝까지 붙잡고 싶다. 이 얼마나 늙고 추악하고, 썩어빠진 생각인가. 내 마음속에 항상 존재하는, 열기와 따뜻함이 느껴지는 이 불꽃을, 너를........ 나는 영원히 지고 가고 싶다.”



일각이 여삼추였다.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꺼져라. 돌아가라. 어서 그레이트 솔트 레이크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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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온을 떠나기 전날 밤. 나는 그와 잔다. 그가 붕대를 벗으면서 경고한다.


“썩 멋진 꼴은 아닐거야.”


“내가 뭘로 보여요?”


“하.”





그가 입 주변의 붕대를 풀자 화상에 짓무른 입가가 나온다. 나는 지체 없이 그의 입에 내 입술을 가져다 대고, 온기를 느낀다. 여전히 그의 입이 거칠고 뜨겁고, 슬픈 것을 확인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키스를 하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남자는 조끼를 벗는다.




나는 남자보다 빨리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서 말한다.


“원한다고 말해요.”


“…………….”


남자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다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한다.


“지독하게 원해. 매일 매일 불에 타 죽어도 괜찮을 정도로 원해.”




매일 당신 생각을 했어. 매시간 매분 매초마다, 기도문에서 천국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당신과 함께 하는 순간을 떠올렸어. 신과 천사, 성인들의 얼굴에서 당신을 봤어. 나는 악마였어. 사탄이었어. 유다였어. 당신이 우주정거장 이야기를 할 때, 옛날에 유행하던 드라마와 쇼팽이라는 사람의 곡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당신이 슬픔으로 지쳐있을 때, 당신이 기쁨으로 소리지를 때, 그 모든 순간들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어. 나를 죽이는 건 당신이어야만 하니까 죽지 않았어. 살아있었어.




남자가 나를 채울 때, 그것은 더 이상 나를 놓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느껴진다. 나는 기꺼이 그의 소유욕을 내 소유욕과 함께 섞는다. 우리는 계속 키스하고, 애무한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나는 신음하는데, 그 소리가 그의 으르렁거림과 같이 공간을 울린다. 그의 붕대가 내 손바닥 위로 떨어지고 있는데도 조슈아는 그것도 모르는 채로 내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는다. 나는 붕대에 감긴 그의 뒤통수에 손을 얹는다. 짙은 머리카락 대신에 붕대의 결과 결 사이를 아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다음 날 새벽, 나는 다니엘이 구해준 지도를 가지고 자이온을 떠난다. 나는 멀리서 나를 지켜보는 조슈아의 눈길을 느끼지만 뒤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모하비로 걸어나간다.







끝내야 할 일이 있다.

이루어져야 할 폭력이 있고.

그들이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왜냐하면

복수는 나의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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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10

복수는 나의 것 10

그가 총이라면, 나는 칼이다. 빅호너를 사냥하는 일은 나와 남자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우리는 한 몸처럼 손 발이 맞는다. 그가 쏘고 내가 가까이에서 숨통을 끊는다. 빅호너의 축축하고 따뜻한 피가 내 손목을 적신다. 이윽고 부족 청년들이 와서 빅호너의 몸을 가져간다.

며칠 동안 우리는 지도를 찾으러 자이온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나는 핍보이로 지도가 있을법한 지역을 전부 체크한다. 남자는 다른 볼 일이 있어 동행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것이 거짓임을 간파한다. 우리는 서로를 믿지 않는다.

내가 지도 찾는 것을 멈추고 잠시 쉬자고 했을 때, 그는 그러자고 한다. 나는 숨을 몰아 쉬면서 자이온의 풍광을 눈에 담는다. 나는 마실 것을 구해오겠다고 하고, 그는 조심하라고 한다. 나는 가죽 부대를 들고 절벽같이 가파른 능선을 따라 내려간다.

경쾌하던 발걸음이 꺾인다. 나의 발목이 뻣뻣해지고, 나는 그대로 굴러 넘어진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천사 동굴 안이다. 다니엘이 나를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괜찮아요?”

“조슈아.”

“조슈아는 잠시 붕대를 갈러 갔어요. 그 멀리서부터 당신을 업고 왔더라 구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다니엘도 침묵한다. 짤막한 침묵 뒤에, 그는 나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한다.

“조슈아를 불러올까요?”

나는 침묵하고, 다니엘은 어쩔 줄 몰라 한다.



--------------------------------------

캐시는 부서진 라디오를 다시 고친다. 아니, 그녀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신디사이저 수신기는 부러졌지만 아직 쓸모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막사를 둘러본다. 작은 공구와 워크벤치, 핍보이 부속품들, 따뜻한 이불과 옷가지들. 그녀는 깨끗한 옷을 보며 깊은 수치심을 느낀다. 전부 남자가 준 것이다. 그녀는 핍보이에서 수신기를 대체할만한 부품들을 찾는다. 그리고 녹음기능을 하는 모듈을 꺼내 라디오에 이식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이루어진다.

그녀는 칼이다.

조슈아 그레이엄의 목을 찌를 비수. 

---------------------------------------------------------------



나는 내가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왜………….”

남자의 목소리가 산산조각 난다. 남자가 우는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총은 울지 않는다.

그가 끝내지 못하는 말의 뒷부분을 내가 완성한다.

“당신을 떠났냐고요?”

나는 고개를 숙인다. 나는 칼이다. 손잡이 없는 칼이다. 남자는 총이다. 탄환 없는 총이다.

“제레미……….”

그 뒤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조차도 알지 못한다. 횡설수설 되도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야기를 급하게 마무리 짓고,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본다.

그는 울고 있다.

​----------------------------



안나 그레이엄이 조슈아를 수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때부터, 케빈 그레이엄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술을 마시면 누구를 때리거나 물건을 부수는 사람은 아니었다. 대신, 그는 자신을 파괴하는 쪽을 선택했다. 케빈 그레이엄이 절벽에서 떨어져 산산조각난 채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었을 때, 조슈아는 일곱 살이었다.

어린 조슈아를 키운 것은 마을의 제레미 캐시디라는 늙은 잡화상이었다. 그도 오래 전에 자식을 사고로 잃었다. 제레미는 무뚝뚝한 남자였지만, 조슈아가 올바른 교육을 받도록 나름 최선을 다했다. 사도신경을 읊게 시키고, 총 쏘는 방법을 가르쳤다. 고기를 손질하는 방법과, 바느질하는 방법, 영어 철자를 정확하게 쓰는 방법 등등을 가르쳤다. 조슈아가 모르몬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그였다.  

그는 항상 조슈아에게 말했다.

“내면의 불꽃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한단다.”







조슈아는 제레미 캐시디가 자신에게 했던 말들을 여자에게 들려준다. 그의 엄격한 가르침과, 자신의 행동들이 얼마나 그를 가슴 아프게 했는지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캐시는 아들의 이름을 정한다.




다음 날, 남자는 후버댐으로 떠난다. 캐시는 자신의 새로운 발명품을 작동시킨다. 기계에서 소리가 난다.




-여기는 NCR 레인저 사령부. 발신인은 신원을 밝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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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9

복수는 나의 것 9

“기억하나요, 어느 날, 옛날에, 당신은 사랑하던 것을 잃었잖아요.

어느 날 사랑의 대상이던 온갖 것을 모조리 잃었다는 걸 떠올려 보세요.

사랑하는 것을 잃는 게 무한히 슬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라고요.”





우리 엄마는 정말 특이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생김새만 보고 아빠를 더 무서워하지만, 그건 그들이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물론 아빠는……우리 아빠지만 솔직히 무섭게 생기기는 했다. 온 몸을 붕대로 감은 사람이 이 세상에 흔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니,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고들 한다는데, 그건 또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네. 일단 아빠도 인간인데? 흠…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 엄마보다 똑똑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엄마 말로는 빅 엠티라는 곳의 과학자들이 자신보다 훨씬 똑똑하다고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빠도 그 소리를 믿지 않는다.

 우리는 엄마보다 기계를 잘 다루는 사람 같은 건 본 적이 없다. 엄마보다 역사에 대해서 많이 아는 사람도 본 적이 없고, 엄마보다 노래를 잘 맞추는 사람도 역시 본 적이 없다. 물론 총은 아빠가 좀 더 잘 쏜다. 부족어는 분필자국따라가 가장 잘 한다(이건 당연하다). 하지만 엄마는 모하비라는 곳에 평화라는 것을 가져온 사람이다. 시저의 군단을 후버댐에서 박살낸 것도 우리 엄마라고 그랬다.

엄마는 뉴 베가스를 다스리거나 오래 한 곳에 있고 싶지 않아서 떠났다. 정말 멋진 일이긴 한데, 그래서 난 요새 조금 걱정이다. 이 곳도 금방 떠나버리는 게 아닐까 싶어서..그러니까 영원히 말이다. 사실 내가 4살 때, 엄마는 1년간 이곳에 없었다. 아빠는 노발대발하며 엄마를 찾으러 떠났고 엄마는 엉망진창이 된 채-다니엘 삼촌의 말에 따르면- 돌아왔다고 그랬다. 인공위성을 찾아 떠났다가 머리와 심장, 척추를 뺏겼다고 했다. 척추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시 찾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여전히 엄마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엄마는 종종 뉴 베가스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간다. 그 시기가 오면 식탁 분위기는 별로 좋지가 않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 말을 잘 하지 않고, 아빠는 좀 더 순찰을 자주 돈다. 엄마는 워크벤치에 하루 종일 앉아서 뭘 만들곤 한다. 뭔지는 잘 모르겠다. 조르고 졸라도 알려주지 않는다. 엄마는 자기만이 아는 비밀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엄마가 짐을 싸고 카라반을 타고 떠나면, 아빠랑 나는 엄마가 사라질 때까지 쳐다본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엄마가 돌아올 쯤 되면 나와 아빠는 집을 깨끗이 치운다. 특히 아빠는 워크벤치가 튼튼한지 몇 번이고 확인한다(솔직히 짜증날 정도이다). 그 때의 나는 엄마를 보고 싶어서 목이 빠질 것 같다. 아빠를 사랑하지만, 아빠는 솔직히 너무 재미가 없다! 어쩌면 그렇게 재미가 없을 수 있지? 다니엘 삼촌이랑 노는 것도 별로 재미있지는 않다. 분필자국따라는 여자친구 때문에 바빠서 나랑 잘 놀아주지 않는다. 슬프게도 이곳엔 아이들이 별로 없다. 다니엘의 아들과 딸들은 전부 어른이라서 나랑 별로 친하지 않다. (형 누나에게는 비밀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책을 읽거나 내 워크벤치에서 엄마가 만든 것들을 따라 만들어본다. 아빠의 지루한 문학 수업이 오기 전에 놀 수 있을 만큼은 놀아야 한다. 하지만 엄마가 있으면 나는 좀 더 놀 수 있을 것이다. 아빠랑 엄마는 방으로 들어가서 잘 나오질 않기 때문이다. 엄마가 가까이에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엄마의 핍보이와 연결된 위치 수신기가 반짝거린다.

이제 깨어날 시간이다.

----------------



“다시 돌려놓게.”



“젠장… 눈치채다니.”

배달부가 마지못해 안주머니 안에 숨긴 권총을 조슈아의 책상 위로 던졌다. 조슈아는 한숨을 쉬며 총의 상태를 눈으로 잠깐 확인한 다음 다시 구석으로 정리했다. 여섯 정의 총이 균일하게 대열을 이루며 놓여져 있었다.


“왜 자꾸 이런 짓을 하는 건가. 총이라면 이미 많이 있지 않나.”


“한 자루 더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건 문제가 아니라네. 이야기하면 원하는 대로 줄 수 있어. 하지만 죄를 지으면 영혼에 좋지 않다는 걸-”


“진지하게…정말 그걸 믿어요?”


“그래. 믿어.”


“그렇게 하면 당신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나 보죠?”


여자는 툴툴거리며 워크벤치에 앉았다. 장마가 찾아오는 바람에 잠시 지도 찾는 것을 미룬 그녀는, 대신에 죽은 말 부족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덫을 개발하는 중이었다. 배달부는 워크벤치 위의 공구를 이것저것 사용해가며 부품을 이어 붙이고 절개하는데 몰두했다. 작업의 흥을 돋우기 위해 핍보이로 녹음해 놓은 음악을 틀었다. 달콤한 캐롤이 동굴 안에 울려퍼졌다.


그녀가 한참 조립과 해체의 과정에 몰두하고 있을 때 엄숙하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편하지 않아.”


“네?”


여자가 뒤늦게 고개를 들어올렸지만, 그는 자리에 없었다.


---------------------------



배달부는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겸손을 떨려는 것은 아니었다.  센스가 있다거나, 재간이 있다거나 하는 칭찬이었으면 그녀도 쑥쓰럽게나마 인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똑똑함은, 그런 종류의 재능은 원자폭탄과 함께 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은 전쟁 전 과학자들-하우스 같은 사람들-의 부스러기와 파편을 주워서 얼기설기 이어붙인다음 그나마 쓸만한 것들을 만드는 것 뿐이었다.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이 기실 황무지의 인류에 대한 적확한 묘사였다.그녀도 그 묘사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옛날의 도면, 블루프린트를 찾고, 원형을 추리해내는 일에는 퍼즐과 같은 즐거움이 있었다. 그녀는 손을 놀리면서 이리저리 맞추어봤다. 최대한 정답과 근접하기를 기원하면서 부지런히 가능성을 탐구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굿스프링스에서 사람들이 게코를 잡는데 사용하던 덫을 조금 더 개량해 부족민들에게 선보였을 때,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었다. 앞으로 부족민들의 삶은 윤택해질 것이고, 그녀는 자이온에 있는 동안 좀 더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터였다. 그녀는 열광하는 부족민들 사이로 조슈아 그레이엄의 얼굴을 찾았다. 


--------------------


배달부는 조슈아 그레이엄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음을 안다. 숨기는 것이라기보다는, 의도적이지 않은 공백이 그의 진술에 존재함을 안다. 그렇다. 그가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진실들이 존재한다. 

그녀의 기억이 없는 지금, 남자와 함께 그 모든 사실들이 죽어갈 것을 생각하면 어쩐지 화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어떤 진실들은 모르는 채 잊혀지는 것이 낫고, 자신은 조슈아 그레이엄의 짐을 같이 짊어질 의무가 없다. 

 



배달부가 남자의 무시무시함을 깨닫는 데에는 채 며칠이 걸리지 않는다. 전신 화상을 입은 몸으로 적들을 도륙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서 배웠음을 깨닫는다. 어떤 것들은 잊혀지지 않고 몸으로 남는 법이다.  자신의 무자비함이 그에게서 온 것임을 깨닫자, 배달부는 조금 머쓱해진다. 


“총을 쏘는 법을 가르쳐주지. 쉬울 거야.”


머릿 속에서 목소리가 들리면 그녀는 눈을 질끈 감는다. 그녀는 과거의 망령이 자신을 앞지르지 않기를 기도한다. 자이온에서 나갈 때까지만은,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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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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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부에게 있어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던 재회 이후로, 놀랍게도(!) 상황은 생각보다 나쁘게 흘러가지 않았다. 배달부는 남자와 자신의 복잡한 관계를 뒤로 하고 그의 도움을 기꺼이 받기로 결심했으며 (따라서 태도도 조금 공손해졌다), 남자는 남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그녀를 도왔던 것이다. 모든 일들이 불필요한 갈등이나 충돌 없이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남자의 친절은 정확하고 일정한 격식이 있었다. 중요한 일이나 정보는 분필자국따라를 통해 전달했고, 그녀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내주면서도 일체의 감정을 배제했다.

조슈아는 그녀에게 사적인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궁금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녀 생각에는- 여자를 쳐다 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의도적인 무시와는 결이 달랐다. 마치, ‘나는 너의 존재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있으니, 너도 그러길 바란다’는 식이었다. 이따금 배달부가 포착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명경지수의 고요함만이 깃들어있었다. 첫날의 동요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마냥 평정심을 유지하는 남자를 보며 배달부는 근원 모를 씁쓸함을 되새겼다.

조슈아 그레이엄은 정말, 신의 사람이 된 것일까.


둘은 부서지고, 무너져, 다시는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



“깨어나는 구름이 도와준다고 했는데요.”

“나도 그 쪽에 볼 일이 있어서.”

“…..”

배달부와 조슈아 그레이엄은 한참을 말 없이 자이온의 협곡 사이를 걸어나갔다. 다니엘의 간곡한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던 그녀가 자청한 임무였다. 조슈아 그레이엄이 따라올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화창한 날씨, 중간중간 보이는 수목과 깨끗한 물. 배달부는 자이온의 아름다운 광경에 조용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자연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매 순간 경이로운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녀의 (기억하는) 일생 동안, 자연은 항상 데쓰클로나 라드로치 같은 기괴하고 끔찍한 형상으로 나타나곤 했었다. 인간을 징벌하는 적대자로서의 자연. 황량한 황무지. 그녀에게 익숙한 풍경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녀가 옆에 있는 남자의 존재도 잊은 채로 경치 감상에 몰두하고 있을 때, 멀리서 총소리와 함께 거친 외침이 들렸다. 조슈아는 당황하는 여자를 재빨리 바닥에 엎드리게 한 뒤, 여자를 감싸 안은 자세 그대로 서쪽에 한발, 북서쪽으로 또 한 발을 쐈다. 조슈아가 두 발을 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가 멎었다.

“………….윽.…….”

“하얀다리 부족은 어디에나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다네.…배달부.”

배달부가 놀란 마음에 숨을 몰아 쉬는 동안 조슈아 그레이엄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방금 전까지 하얀 다리 부족 정찰병들이 서있었던 낭떠러지 위를 살폈다. 배달부는 무릎을 털고 일어난 뒤에서야 남자가 아득히 머나먼 곳에 있는 적 두 명을 각각 한 발에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운이 저 정도로 멀리에 있는 적을 맞출 수 있을까?

아니. 베테랑 퍼스트 레콘도 못 맞추는 거리다. 인간이면 불가능한 거리라고.  

순간 배달부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녀는 그제서야 남자가 전설의 말파이스 군단장과 동일 인물임을 실감했다.


배달부에게는 그 후로 그 뒤의 침묵이 모래알처럼 속에서 껄끄럽게만 느껴졌다. 그녀 딴에는, 그렇게 모진 말을 몰아붙인 상대에게 고맙다고 하는 것은 영 모양새가 살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또 그냥 침묵을 유지한 채로 있기에는…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편하지 않았다.

배달부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묵묵부답으로 야오과이와 사마귀들을 보이는 족족 쏴서 쓰러뜨렸다. . 남자의 폼은 절도 있었고 정확했으며, 총알은 제 위치를 알았다.

‘전부 헤드샷이었어.’

배달부는 속이 살짝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남자의 것과 같은 자신의 권총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


“곧 있으면 도착할거야.”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남자가 입을 연지 얼마 안되어서 그들이 찾던 트레일러의 잔해가 나타났다. 전 문명의 슬픈 흔적들.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와, 부족들의 금기가 뒤섞인 얼룩 같은 존재.

투명한 물살을 헤치며 그녀가 구조물 안으로 들어가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체가 흔들렸다. 조슈아가 곧바로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는 남자의 단단한 팔뚝이 자신을 지탱하는 것을 느끼며 차 내부를 유심히 살폈다.

“찾았다.”

쓰레기들 사이에 놓여진 나침반을 주우며 그녀가 만족스러운 탄성을 내뱉었다.

고장난 나침반이었지만, 간단하게 손볼 수 있는 정도의 미세한 고장이었다. 그녀는 세심하게 손을 놀리며 내부의 부속품들을 끼워 맞췄다.

조슈아 그레이엄은 나침반 고치기에 몰두하고 있는 여자를 지켜보며 물었다.

“아직도 기계를 고치는 걸 좋아하나?”

 “……..네. 이상하게도 이런 잡다한 지식은 잊혀지지 않아서.”

조슈아 그레이엄이 그녀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 재회 이후로 처음이었단 건, 둘 다 알아차리지 못한 사실이었다.

배달부가 나침반 수리를 완료하자 둘은 런치 박스와 의료키트를 찾아 출발했다. 둘 사이에서 침묵은 점차 어색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


다니엘은 순박한 인상에 선량한 미소를 띤 사내였는데, 유독 배달부를 볼 때마다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만 하면, 눈썹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로 어색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배달부는 그가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도통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의 선량한 의도까지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정말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리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기 요청한 물자들이에요.”


캐시가 육성으로 상황을 보고하는 동안 조슈아는 구호품으로 가득 찬 배낭을 그에게 건넸다. 다니엘이 짐을 받으면서 휘청거리는 듯하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의료 키트는 물에 빠지면 곤란한데 큰 실수를 할 뻔 했군.. 배달부, 밤이 어두웠으니 지도는 내일 찾는 것으로 하고. 이만 여기서 쉬고 가도록 하게나.”


배달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밤의 자이온은 아름다웠지만, 지리를 모르는 자신이 돌아다니기에는 무리였다.

“난 다시 천사동굴로 돌아가겠네.”

“아무리 자네가 이 곳 지리에 해박하다 하더라도 요즘 같은 시기에 단신으로 자이온을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어.”

“걱정 말게나.”

둘이 한참을 옥신각신하는 것을 지켜보던 배달부는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다니엘 말이 맞아요. 게다가 내일 아침에 저 혼자 돌아다닐 수는 없으니깐요.”

핍보이가 있으니 괜찮다고 하기에는, 그녀는 솔직히 자이온에 대해서 아는 것이 부족했다. 하얀다리정찰병들이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괜히 나다니다가 다른 부족들에게 무례한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


다니엘이 배달부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만한 부족민이 있다는 이야기를 꺼내기 직전, 조슈아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서 신세를 지는 수밖에 없겠군. 고맙네.”

다니엘이 대꾸하기도 전에 그는 성큼성큼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걸어나갔다. 붕대를 갈러 가는 것이었다.



------------------


캐시는 깨끗한 물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는 으슬으슬한 추위를 느끼며 모닥불을 향해 다가갔다. 그 곳에 조슈아 그레이엄이 앉아있었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서서 남자가 성경을 읽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가 모닥불 가까이로 다가가자, 조슈아는 잠깐 배달부를 보는 것 같이 고개를 돌리다가 이내 다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녀를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대하기로 작정한 것같았다.


“성경이 그렇게 재밌어요?”

“………..”

“솔직히 몇 천년전 고대 사람들이 그렇게 뭘 알았을까 싶어요. 지구가 이 지경이 된 것까지 알려나?”

농담이 남자에게 먹혀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그녀는 조금 불퉁해졌다.

“그럴지도 모르지.”

한참의 침묵이 지나서야 남자가 성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이 모든 게 하늘의 계획대로라는 거에요?”

“그건 내가 알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겠지만.”

그에게서 어떠한 유의미한 대답을 이끌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배달부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말수가 없는 부운과 다니면서 생긴 습관이었다.



“자이온은 참 좋아요. 하늘에 별들이 잘 보여서. 스트립은 워낙 이곳 저곳에 불빛이 많아서 별 보기가 힘들거든요. 뭐, 황무지에서 밤을 새면 사정이 다르지만. ”

“…………..”

“저기 반짝이면서 움직이는 별은…………..”

“우주정거장이지.”

“어떻게 알았어요?”

성경 때문에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미 붕대 때문에 제대로 된 표정은 볼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여자는 붕대가 아니고서라도 남자의 감정을 읽는 것은 힘들 것임을 직감했다.

그는 원체 그런 사람인 것같았다.

“질문 하나 해도 되나요?”

“…………….”

“제 나이가 몇이죠?”

“........서른 하나.”

“이런….세상에…내 20대 청춘이 다 지나가버렸네. 뭐.. 그냥저냥 살다 죽는 게 황무지 인생이라곤 하지만.”

남자가 대답을 하건 말건 배달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 항상 궁금한게 있었는데. 그 총 옆면에 새겨진 글귀는 무슨 뜻이에요?”

“..........빛이 어둠을 비추는데, 어둠은 이를 알지 못하더라. “

“철학적이네. 아케이드가 인용할 법한 이야기 같고. 성경이죠?”

남자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그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헀다.

그녀의 이야기는 굿스프링스에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제이슨 브라이트의 로켓이 날아가던 아름다운 광경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것이 자신의 가슴을 아프게 했고 눈물 흘리게 했다고, 그녀는 고백했다. 노박의 공룡 기념물에서 부운을 만난 이야기와 그의 슬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킹이라는 사람이 기르는 렉스라는 개와, 녀석을 고쳐주러 제이콥스 타운까지 간 일. 공포스러웠던 화이트 글로브 소사이어티 안의 식인 풍습과 탑스 카지노에서 베니를 유혹한 이야기까지 늘어놓았다.

자신이 잠에 빠져드는 것도 알지 못한 채로 배달부는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아침이 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 부드러운 모포를 여러 겹으로 뒤집어 쓴 채 침낭 안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우리는 행복했을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다 망쳐버렸어.”

조슈아 그레이엄은 모두가 잠든 새벽에 잠에서 일어났다. 여자가 온 뒤로 처음 꾸는 악몽이었다. 조슈아는 냇가를 가로질러 여자가 깨어나는 구름 옆에 잘 누워있는 것을 먼발치에서 확인했다. 그는 속으로 조용히 안도했다.


그는 더 이상 불가능한 숙면을 포기하는 대신, 모닥불 가까이에 앉아 성경을 읽었다. 여자가 온 뒤로 활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 여자의 말이 섞여 들어갔다. 욥의 고통 속에 여자의 고통을 읽었고, 바리새인들의 위선 속에서 자신의 일면을 발견했다. 그는 성경 인물들을 끔찍할 정도로 질투했다. 적어도 그들의 죄는 씻을 수 있는 것일 터였다.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자녀임이라.

 그는 자신의 죽음이 가능하지 않고, 가능해서도 안된다고 여겼다. 캐시가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은. 그리고 캐시는…..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었다. 마치 말파이스가 오래 전 그녀에게 원하던 죽음을 선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녀도 조슈아가 원하는 최후를 선물하지 않을 터였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녀에게는 그럴 의무가 없었다.


조슈아는 장기가 끓어오르는 것과 같은 고통 속에서 쓰게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살아있다는 것이 자신을 지나치게 기쁘게 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면의 불꽃이 되어 자신을 점점 집어 삼키고 있었다. 기쁨은 죄악감을 불러왔고 그것이 자신을 파멸로 이끄리라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마치 4년 전처럼. 자신은 분별력을 잃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다시 한번 무저갱으로 추락하리라.


그는 자신의 다음 죽음은 끔찍하고 확실하기를, 그리고 여자가 악몽을 꾸지 않기를 기도했다.


불면의 밤이었다.



-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끔찍한 형상의 남자가 걸어왔을 때, 늙은 캐시디 영감은 놀라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가 그런 몰골로 돌아오리라 예감한 것만 같았다. 영감은 주저하는 마을 사람들을 시켜 남자를 침대에 뉘였다. 의사를 부른 뒤 스팀팩을 놓고, 남자의 몸을 물수건으로 씻었다. 남자의 입에서 끔찍한 소리가 났다.

 

잘생겼던 얼굴이 화상으로 인해 형체 없이 짓무르고 뒤틀려있었다. 다니엘이 구토감을 간신히 억누르며 캐시디 영감을 도울 동안 어린이 몇 명이 구경을 왔다가 비명을 지르며 내쫓겼다.

우리 마을에 악마가 왔어!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서, 소문은 뉴가나안 전체로 퍼졌다.

조슈아 그레이엄이 불 속에서 살아 돌아왔다.

마을 장로들이 이 건을 두고 밤을 새며 갑론을박을 벌였다. 토론은 설전이 되었고, 장로들은 땀과 침을 튀겨가며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했다. 남자는 과연 하늘에서 내린 시험인가,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남자는 우리 마을의 명예에 먹칠을 했어.

하지만 모든 죄는 사함 받을 수 있다네, 원수진 자를 용서하라는 말도 있고 말이지.

그가 우리 마을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오, 헤일런. 그런 얄팍한 계산법이라니. 남자가 해가 된다고 해도 우리가 거둬야한다고 보네.

그가 저지른 악행은 용서받을 수 있는 차원이 아니야. 시저가 이 사실을 안다면 분명히-

하지만, 우리 아니면 누가 그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가 뿌린 씨앗이 아닌가.

한참을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새벽 동틀 무렵이 되자 토론은 중단되었다. 다니엘이 문을 노크하며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가 깨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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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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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필자국따라는 굉장히 난감한 상황에 처 해있었다. 자신이 힘들게 애써서 데려온 배달부와 조슈아의 사이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둘이 구면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 참 멋지고 신기한 일이네요!”라고 탄성을 내뱉은 분필은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을, 둘의 냉랭한 눈빛 교환으로 알아차렸다. 배달부는 분필이 있건 말건, 주위에 부족민들이 듣건 말건 조슈아를 향해 날 선 말들을 속사포같이 내뱉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당신이랑 몇 년간 눈맞고 배 맞은 사이라고 한다 쳐. 하지만 동시에 당신이 내 원수라는 사실도 받아들이라고? 허풍이 지나치시네. 내가 아무리 내 머리에 총을 쏜 자식을 유혹했다지만 진짜로-”

“누가 그랬나.”

“뭐?”

“누가 네 머리에 총을 쐈냐고 물었다.”

조슈아가 엄숙하고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추궁 하자 배달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톱스 카지노의 베니. 그 놈이 내 머리에 총을 쐈어. 그래서 기억을 잃은 거고. 대답이 됐어?”

“그 놈은 살아있나.”

“배때지에 칼을 손수 쑤셔 박았으니, 살아있을 턱이 없지.”

분필자국따라는 정말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저리 무서운 사람이 다 있지? 자기가 데려온 사람은 보통 인물이 아닌 것같았다. 하얀다리 부족 잔당들을 절멸시킨 건 요행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참의 어색한 침묵이 지나자 조슈아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


“내가 … 왜?”


“다 말하지 않았나? 난 네 원수라고. 일전에 넌 날 죽이려고 했었지. 그걸 마무리지어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니, 내가 갚는다. 원수들이 넘어질 때가 곧 온다. 그가 엄숙하게 성경의 한 구절을 암송하자, 동굴 안의 부족민들이 술렁거렸다. 자신들의 부족장이 손수 죄 사함을 요청하고 있었다. 저 낯선 여자한테서! 



배달부는 이 모든 상황에 현기증이 난다는 듯이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가 안주머니 속의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그녀는 긴 한숨과 함께 한 모금을 내쉰 뒤에야 입을 열었다.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만이 동굴 안에 울렸다.




“내가 여기서 당신을 죽인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절대 모하비로 돌아갈 수 없겠지. 여기 사람들이 이 곳에서 ‘신 놀이를 하고 있는’ 당신을 죽인 나를 도와줄 턱이 없고, 이대로 하얀다리 부족이 여길 공격할게 분명한데. 내가 왜 그런짓을 하겠어.”



조슈아의 침묵을 무언의 신호로 받아들인 그녀는 계속해서 가시 돋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슬프게도… 난 당신에게 어떠한 유감도 없어. 캐시 베넷은 이미 오래 전에 정말로 죽은 것 같거든. 그 긴 이야기를 듣고도 어떠한 감상도 떠오르지 않으니까 말이지.”



분필자국따라는 그 순간, 조슈아의 눈빛이 실망과 슬픔으로 굳어지는 것을 포착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마지막 비수를 꽂았다.


“혹여 내가 기억이 떠올라서 당신을 죽이고 싶어지면, 그 때는 생각해보겠지만…. 잠깐,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굳이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걸? 없어져서 잘됐지. Good riddance. 그런 기억이면 없는 게 나아.”


조슈아가 충격으로 굳어 있는걸 난생 처음 본 분필은-조슈아는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사색을 하건, 기도를 하건-, 담배를 발로 비벼 끈 배달부가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배달부가 분필의 어깨를 가볍게 툭,하고 쳤다.

“분필자국따라. 쉴 곳이나 잠 잘 곳 있어요?”

아까와는 딴판인 정중하고 예의 바른 목소리였다.

분필자국따라는 뒤통수에서 따갑게 느껴지는 조슈아 그레이엄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이방인에게 길을 안내했다.






-----------------------------------







배달부는 화가 났다. 정말이지, 분노가 치밀어서 온 뇌세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여행을 하던 와중에 하얀다리부족인가, 하얀어깨부족인가에게 습격을 당한 건, 그래 이미 고려했던 변수였다. 하지만 기껏 비장하게 기억을 찾아서 왔더니만, 유일한 정보원이라고 생각했던 조슈아 그레이엄이란 작자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내가 저 붕대 사나이랑 잤다고?’


원수라고도 했다. 하지만 배달부는 자신이 원수랑 진짜로 잘 정도로 그토록 분별력이 없을 거라곤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남자가 무엇을 속이거나 숨기는 것 같진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그는 지나치게 차분하고 막힘 없이 전후 사정을 설명했고-마치 그 순간을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사람인 것마냥-, 그의 목소리에서는 시종일관 모종의 진실성이 느껴졌다.


‘속이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어….’


배달부는 남자의 눈빛과 말투에서, 그리고 행동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기시감은 울화와 함께 그녀의 심사를 괴롭혔고, 배달부는 눈앞에서 고고하게 성경을 읊는 남자를 흠씬 두들겨 패고 싶은 욕망을 참느라 고생해야만 했다. 베니에게서 느꼈던 살의와는 구분되는 충동이었다.

 ‘뭐… 내가 죽이기엔 너무 맥 빠지는 상대인걸.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아니 불쌍하다니, 정신차려라!’


배달부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울분을, 그리고 그 과거에 묻어있는 비극적 색채에 대한 울분을 자꾸만 남자에게 풀고 싶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화를 내건, 욕설을 내뱉건 남자의 말은 아마 사실이리라.

그러나 동시에 배달부는 생각했다.


 ‘이미 나는 내가 누구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 ‘

그녀는 결심했다.

‘됐어. 이 곳을 당장 뜨자. 저 조슈아인지, 불탄 남자인지 뭔지는 대자연 속에서 하느님 말씀이나 전파하면서 살라고 하고. 난 다시 모하비로 돌아가야겠어. 아케이드의 말이 백 번 옳았지. 난 아무런 소득이 없는 헛된 짓을 한 거야.’


핸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 끔찍한 일을 겪은 존재는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을 거라고. 그 말은 지혜의 충고임에 틀림 없었다. 

배달부의 머리가 뒤죽박죽 엉켜 들어갔다. 그녀는 엉킨 실타래처럼 엉망이 된 기억의 무덤을 애써 마음 한 켠으로 치운 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자이온을 탈출해야 한다.

붕대-성경-사나이가 부족민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은 건 그나마 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다행이었다. 하루빨리 돌아갈 날을 고대하며-그리하여 이 번다한 상황에서 탈출하기를 기원하며- 그녀는 몽롱한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





어떤 꿈을 꾸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자의 진술이 그녀의 머릿속에 괴기스러운 형태로 재현되었다. 불타는 자이온, 붕대에 둘둘 말린 채 춤을 추고 있는 자신과 얼굴 없는 남자. 실버슈라우드의 목소리로 읊어지는 성경 구절들. 그리고…………..

슬픈 건지, 불쾌한 건지, 하다 못해 그리운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배달부는 몸을 뒤척였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인기척이 다가왔다. 분필자국따라였다.


“어……저………..조슈아가……….. 당신을…….찾아요……엄…………”



둘 사이에 끼게 되어서 정말 유감이고 난감하다는 듯이 분필자국따라는 모자에 달린 깃털을 매만지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배달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분필은 위로하려는 듯 그녀에게 계속해서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많이 놀랬죠? 조슈아는 어제 잠을 안자고 계속 총을 만지던데..아, 조슈아 이야기는 하면 안 되는데,,, 가 아니고- 그게…아침으로는 뭘 먹고 싶으세요? 조슈아를 만나는 동안 준비해 놓을게요. 여기는 그 쪽이 사는 곳이랑은 다른걸 먹지만 그래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


배달부가 애써 미소 지으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는 연갈색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한다음 자신의 핍보이를 확인했다. 현지 기준 오전 9시 56분.  스스로 민망할 정도로 오래 잤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는 재빨리 옷 매무새를  정리했다.

“하루 빨리 이곳에서 나가야 될 것 같네요. 그 과정에서 분필씨네 부족에게 신세를 지게 된 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요. 어떻게든 이 은혜는 갚을게요.”


“조슈아가 그냥 하라고-“


“그 사람 이야기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배달부가 차가운 눈빛을 쏘며 분필의 말을 끊었다.


분필은 앞으로 더 험난한 여정이 자신 앞에 펼쳐져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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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7

복수는 나의 것 7


well your faith was strong but you needed proof 
you saw her bathing on the roof 
her beauty and the moonlight overthrew you 
she tied you to her kitchen chair 
she broke your throne and she cut your hair 
and from your lips she drew the hallelujah 




 

지미 핸론은 하우스 리조트의 발코니에서 묽은 위스키를 홀짝이며 일출을 바라보았다. 너무 많은 죽음이 있었다. 너무 많은 후회가 있었고. 그가 회한에 잠기는 것도 잠시, 뒤에서 경쾌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그 소리의 주인이 배달부라는 것을 알았다. 종종 NCR 대사관이나 캠프 맥캐런에서 온 소포를 배달하곤 했던 여자였다. 멀끔한 얼굴에 차가운 눈빛, 그리고 비상한 말솜씨를 가진, 한번 만나면 잊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머리에 총을 맞고도 다시 일어섰다는 이야기는 한 때 모하비에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핸론은 그 기이한 사건이 사실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그녀는 지상 위의 사람이라는 느낌보다, 배달부 그 자체로 그에게 각인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의 표상과 같은 존재. 그것이 그녀였다. 하지만 반가운건 반가운 거였고, 그는 격려를 담아 배달부에게 일장연설처럼 긴 인사를 건넸다.


“서부에서는 이런 것들을 좀처럼 볼 수 없지. 아, 호수 말이네. 자연적이든지 인공이던지 간에 아무튼... 우리 NCR은 댐 사용에 태만했었거나, 모든 수자원을 고갈시켜버린 것이야. 오웬즈, 이사벨라, 샌 루이스... NCR은 보유한 지하수층을 모조리 사용해 버렸고, 남은 건 많은 진흙과 먼지뿐... 수면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는 것은 참 오묘한 기분이군. 처음엔 익숙치 않았지만 지금은 그려러니 하지. 그런데 자네가 여기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니 이젠 익숙해져 보이는군. 그것이 현 레인저의 삶이야. 동부를 주시하는 것. 자네가 바로 소문의 그 배달부로군. 라디오 수신에서 누군가가 굿스프링에서 자네에게 위해를 가했다면서? 모하비 황무지는 선량한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건 다치게끔 하지. 하지만 자네가 NCR에게 수많은 도움을 준 것에 경의를 표하네. 자, 용무가 무엇인가?" (*인 게임 발췌)


“항상 말이 많군. 핸론.”


“거 참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자네는 똑같은 소리를 했었는데, 머리를 다친 이후라서 그런지 맹해보이는 것 같기도 하네. 본부에서 여기까지 뭐라도 배달한다는 소식을 줬으면 미리 자네에게 따뜻한 크럼파이라도 내주는 거였는데 말이야. 하지만 불행히도 너무 일찍 찾아왔어. 아침식사를 하고 가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할거야.”


배달부는 물끄러미 핸론을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녀의 얼굴과 톤에서, 그는 그녀가 잡담을 나누려고 온 것이 아니란 걸 눈치 챘다.


----------------------

“본론으로 들어가겠어. 거래를 하지. 지미 핸론.”



얼마 후, 핸론은 아까와 같은 자리에 앉아 저 멀리 소실점으로 사라져가는 배달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핸론의 조작을 묵인해주는 대가로 배달부가 요구한 것은 뜻밖에도 조슈아 그레이엄에 대한 정보였다.

사무실의 칙칙한 벽에 기댄 배달부는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질문을 이어나갔다.



“군단의 후버댐 침공에 대해서 이야기해줘. 되도록이면 자세하게. 말파이스가 어떻게 싸웠는지, 어떻게 무너졌는지. “



핸론은 카라반에 능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상대방이 패를 숨기고 있다는 것 쯤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수십 년간의 레인저 복무 생활이 가져다 준 직관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어차피 그녀에게 순순히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 거래에서 그는 명백하게 을의 위치에 서있었다.


말파이스, 조슈아 그레이엄은 전쟁의 신이 빚어낸 피조물같았지. 폭력이 지상에 두발로 걸어다닐 수 있게 된다면, 꼭 그 같은 모습이 될 거라고 줄곧 여겨왔어. 후버댐에서 그는 NCR레인저들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채로 선봉에 서 있었지. 그의 얼굴에서 파악해낼 수 있는 건 차가운 눈에 서려있는 분노 뿐이었어.


핸론은 숨을 골랐다. 말파이스의 살기등등한 형상을 떠올리기만 해도 미약한 현기증이 났다.


아직도 우리가 어떻게 그를 꺾었는지는 이해할 수 없어. 신의 축복이라든가, 말파이스의 자만심과 광기가 스스로를 삼켜버린 걸지도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는걸 자네에게 알려주겠네. 그날 밤, 우리가 대부분의 전선을 잃고 후버댐 너머로 후퇴한 채 간신히 2일 동안 교착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었어. 말파이스가 소수의 병사들을 데리고 전선을 이탈했다는 보고를 받았지. 그리고 그는 보울더시티로 군단병들을 일제히 보냈어. 우리에게는 명백한 기회였어. 우린 보울더 시티를 폭발시켰어. 말파이스가 없는 군단은 우왕좌왕했고 그대로 그들이 전선을 추스릴말미를 주지 않은채로 NCR 트루퍼들이 밀고 들어가자, 그들은 후버댐을 맥없이 내주었어. 그게 다야.


 그가 어째서 전선을 이탈하는 무책임한 짓을 저지른 건지는 모르겠네. 확실한건, 말파이스가 현장에 있었다면, 보울더 시티에서 군단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거란 거야. 

뭐,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이 황무지에서 한두 개인가?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는 거지. 솔직히 말해서 그가 시저에 의해 불태워진 채로 그랜드 캐니언의 심연으로 떨구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말파이스가 자신의 몰락을 의도적으로 자초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가졌었지. 하지만 정답을 찾아내려면, 그에게 직접 묻는 수밖에 없을 걸세. 그리고 그 건 쉬운 일이 아닐거야. 그가 살아있느니 하는 소리가 군단에서는 도는 모양이네만, 살아있어봤자 멀쩡한 꼴이겠는가? 아마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을 것이고, 나라면 그런 존재를 만나고 싶지는 않을걸세.

자네가 무엇을 찾고 싶어하는 건지는 모르겠네만. 이게 정말 다네.




----------------


핸론은 미지근해진 위스키로 지친 성대를 축였다. 쓰고 맹한, 몽롱한 맛이 혀끝에서 맴돌다가 목으로 흘러들어갔다. 라디오에서는 미스터 뉴베가스가 즐겨 선곡하는 페기 리의  “자니 기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신의 긴 이야기를 듣는 동안 배달부의 표정에는 어떠한 미세한 변화도 없었다. 마치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듣는 것 같은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그녀에게 핸론은 잠깐 호기심을 느꼈지만, 이내 그것을 폐기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타인에 대한 도가 지나친 오지랖이나 연민은 황무지에서 제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핸론은 문득, 뒷주머니가 허전한 것을 느꼈다.


제기랄, 저 여자가 쥐도 새도 모르게 레인저 세쿼이아까지 대가로 가져간거군.




하지만 그것이 배달부의 계산방식이라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



-------------------





"군단은 괴물이야."

".............."

"난 당신네들을 전부 경멸해."


캐시가 으르렁거리며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말파이스의 손을 거칠게 후려쳤다. 

"가까이 오지마."


혈육과의 석연찮은 재회 이후로 캐시의 퓨즈는 완전히 나가 있었다. 분노를 삭히던 그녀는 자신의 막사 구석에 놓여있던 라디오를 들어올린 다음 바닥에 힘껏 내던졌다. 라디오가 산산조각 나면서 부서졌고 부품들은 이리저리 튀었다. 말파이스가 구해온 신다사이저 수신기가 찌그러졌다. 


"캣."

"내 이름 부르지마. 다시 내 이름 부르면 뛰쳐나갈거야."

"그렇게 놔둘 것같나?"

"여기서 소리지르고 발광하면 천하의 말파이스 군단장님의 얼굴에 먹칠은 할 수 있겠지. 병사들에게 끌려나간 다음에 참수 당하거나 십자가에 못박히면 서로 좋은 일 하는 거 아닌가?"

"말 조심해.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마."

"당신은 그렇게 말 할 자격 없어."

캐시는 격한 구토감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사라져가다가, 거꾸러지는 매그너스의 뒷모습을 생각했다. 이제는 루키우스가 된 나이젤의 머리에 세겨진 문신도 떠올랐다. NAM GLORIA.



"당신이 진정으로 날 사랑한다면, 이런 곳에 놔두지는 않을거야."


"서부의 무자비함을 과신하는군. 밖에 발을 내딛는 순간 너는 죽임 당할 거다. 군단의 울타리 안이 그나마 안전한 걸 모르겠나."


"상관 없어. 최소한 인간으로 살다 죽는게 나아."



말파이스의 가면 너머의 조슈아 그레이엄이 산산조각나는 것을 느끼며, 남자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생각해보면 오래 버틴 것이었다. 캐시 베넷과 조슈아 그레이엄의 기만이 한 쌍처럼 어울려서 이루어낸 한 때였다. 캐시가 고개를 들어 현실을 바라보면 간단히 깨져버릴, 그런 연약한 평화였다. 





"진정되면, 다시 내 막사로 오도록."





말파이스는 막사 밖으로 나가자마자 보초병들에게 캐시가 '허튼 짓'을 하지 않도록 감시할 것을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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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온에 온 것을 환영하네. 좀 더 좋은 첫인상을 남겼으면 좋았겠지만, 내가 들은 바로는 하얀 다리 부족이 우리를 앞질렀더군.”




분필자국따라-자신을 구해준 부족 청년의 이름이었다-의 인도를 받아 들어간 동굴은 어두컴컴하지만 따뜻해서 안도감을 줬다.  마치 그녀에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유년시기의 기억을 그대로 보존해 놓은 곳인 것 같았다. 배달부는 향초와 건 파우더 냄새를 잔잔하게 코 끝에서 느끼며 계속해서 길고 긴 동굴을 걸어 들어갔다. 마침내 동굴의 막다른 곳에서 부족장 격인 남자와 마주했을 때, 그녀는 그가 바로 자신이 찾던 소문의 불탄 남자임을 직감했다. 말 그대로 불에 탄 남자였다. 온 몸을 붕대로 감싼 남자는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인 45구경 권총을 정리하고 있었다. 해피 트레일 상단이 공격 받은 것에 대해서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는 불탄 남자의 목소리에는 엄숙함이 깃들어있었지만 유창하게 위로의 말을 내뱉는 동안 그는 배달부를 쳐다 보지도 않고 있었다.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격조 있는 옛날의 음률과 어휘들에서 배달부는 근원 모를 미약한 향수를 느꼈다.



그녀가 감상에 빠져 침묵을 지키자 남자가 고개를 돌려 여자를 쳐다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쳤고 배달부는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이 자이온의 하늘처럼 파랗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창백한 불꽃같다고, 배달부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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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을 발휘해보자. 당신은 뉴가나안에 위치한 2층 짜리 목조 주택에 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레드 스태그 고기를 구우면 여자가 침실에서 비척비척 걸어나와 당신의 등에 기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연결되어있던 몸에서 온기가 뿜어져나온다. 당신은 조용히 웃지만 그것을 여자는 알지 못한다. 레드 스태그 스테이크에 전쟁 전 향신료를 뿌린 아침이 완성되면 당신과 여자는 2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깨운다. 당신과 똑같은 검은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여자 아이와, 당신과 여자를 반반씩 닮은 남자아이이다. 아이들은 고기의 냄새를 맡고 환호성을 지르며 계단을 빠르게 내려간다. 조심하라고 여자가 주의를 준다. 아침을 푸짐하게 먹고 씻고 나면, 당신과 여자는 하루의 일을 시작한다. 여자는 마을 사람들의 농기구와 무기를 고쳐주고, 당신은 뉴 가나안의 아이들을 가르친다. 여자가 하는 일은 당신에게는 신비의 영역이다. 전쟁 전의 기술이 그녀의 손끝에서 새로운 형태로 완성된다. 여자는 모르몬을 믿지 않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품성과 실력에 기꺼워한다.


일이 끝나면 당신과 여자는 저녁을 준비하고 아이들과 대화를 나눈다. 여자는 자랑스럽게 자신이 시큐리트론을 고친 일을 이야기한다. 아마 집사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여자의 말에 아이들은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른다. 당신은 그 아이디어가 석연찮지만 알지 못하는 일이기에 입을 다문다. 당신이 성경과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은 졸음을 참지 못한다. 여자는 그걸 보면서 깔깔 웃고, 당신은 어쩐지 매우 부끄럽다. 하지만 졸음을 참는 아이들이 너무 귀여운 나머지, 당신도 웃고 만다. 


밤이 되면 당신과 여자는 길게 사랑을 나눈다. 정사가 끝나면 당신과 여자는 서로의 어깨죽지에 고개를 파묻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여자는 당신의 귓가에 속삭인다.





"잘자요, 조슈아 그레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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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6

복수는 나의 것 6

빛이 어둠을 비추는데, 어둠은 이를 알지 못하더라. 

The light shines in the darkness, but the darkness has not understood it 

καὶ τὸ φῶς ἐν τῇ σκοτίᾳ φαίνει, καὶ ἡ σκοτία αὐτὸ οὐ κατέλαβεν








조슈아 그레이엄은 여자를, 캐시를 갈망한다.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여자를 갈구한다.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그녀의 몸을 열고 들어간다. 그래도 부족하다. 어떻게 해도 가닿을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닫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선조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한다. 허공을 외로이 맴도는 인공 별들을 쏘아올린 사람들을, 그럼에도 결국 세상의 종막을 막지 못한 그 치들의 열망과 집착에 공감한다. 하지만 그는-진부한 표현일지는 몰라도-별들과 우주의 광활한 공간보다 눈 앞의 여자에 더 큰 신비와 불가해함을 느낀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과 눈빛에서, 손끝과 귓볼에서, 우아한 눈썹에서 미학적 공리를 발견한다. 풀지 못하는 난제, 증명불가능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게되는 하나의 가설.


 아마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갈급함을 영영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그는 조금 즐거워진다. 

이해하게해서는 안된다. 알게 해서는 안된다. 비밀놀이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멈출 수 없다.


"나를 사랑하나요?"

섹스가 끝난 후 느긋하게 후희를 즐기던 여자가 조슈아에게 농을 던지듯 질문한다.

그녀는 그런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거대한 질문을 던지곤 한다.그리고 남자는 그럴 때마다 침묵으로 반응한다. 응답하지 않는게 아니라, 그녀에게 말할 수 있을 때 까지 시간이 걸릴 뿐이다. 

".........."

"하긴, 웃기는 질문이였네. 난 사람이 아니고 당신을 물건에 욕정하는 변태성욕자로 몰긴 싫으니까.. 곤란하게 하지 않을게요."


여자가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조슈아는 그녀의 눈이 깊은 웅덩이처럼 고요하다고 느낀다.


 

"그런게 아냐."


사랑보다는 좀 더 어두운 단어가 필요해. 광막해보였던 단어의 바다는 그의 현실 앞에서 빈곤하게 축소된다.

부족어에는 적합한 단어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슈아 그레이엄은 더 이상 통역사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정의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눈 앞의 여자에게 다시 입을 맞춘다.

그의 손이 이불 밑 여자의 허벅지 아래로 내려가자 여자가 작게 경련하는 것이 느껴진다. 부드러운 살과 근육, 뼈 마디 마디가 반응하고 있다. 그의 허벅지가 단단해진다. 캐시가 웃는다.



"또 하게요?" 

"......"



대답 대신에 그는 여자의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쥔다.여자가 웃으면서 고개를 젖힌다. 여자의 상아빛 목에 조슈아는 고개를 파묻는다. 체취를 들이킨다.


그래도 부족해.

지나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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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파이스 군단장의 캠프가 뉴멕시코에서 모하비 사막 서쪽 부근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뒤늦게 라니우스와 시저 본대의 군세가 합류하자 군단의 사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캐시는 모든 것을 먹어치워버릴 것처럼 구는 군단의 폭력을 경멸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서있는 남자, 말파이스를 증오했다. 괴물 아래에 있는 군사들도 말파이스를 신처럼 여기는 나머지 그의 발자국과 그림자가 닿는 곳이면 따라다니며 더듬고 싶어했고 그의 얼굴이 새겨진 주화를 신성시했다. 스스로를 전쟁의 신 마르스로 참칭한 시저보다 오히려 말파이스 쪽을 더 그렇게 여기는 것만 같았다. 그 사실이 시저의 구미에 당길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캐시는 아마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캐시는 남자를 둘러싼 그 모든 열광스러운 떠들썩함을 비웃었다. 자신의 웃음이 그 철옹성을 허무는 데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게는 그런 순간들이 필요했다. 군단에게 짓밟히거나 먹히지 않으려면. 그 바보들은 결코 말파이스 너머의 조슈아 그레이엄을 알지 못하리라. 나만이 볼 수 있는 그의 얼굴을, 그들은 죽어서도 보지 못하리라.





세 갈래로 이루어진 군단병들이 모이고 시끌벅적한 캠프의 분위기가 진정되자, 서기관은 노예들을 아레나로 불러들였다. 인원수를 세고 점검한다고 했다. 몇 명이 행군에서 죽었는지, 병들었는지-즉, 얼마뒤면 죽을 예정인지-, 임신한 여자가 있는지-그래서 더 많은 인구를 생산하는지-, 를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평소에 말 한마디 걸 일이 없던 노예들과 같이 도열했다. 


1번. 레슬리.

2번. 존스.

..

....

...45번 오스틴

46번 앨런.


서기관 옆의 의료 노예가 앨런이라는 여자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대뜸 그녀의 배를 향해 손을 뻗었다. 환자가 두려워하건 말건 의료 노예는 진찰용 핍보이를 그녀에게 채웠다. 



핍보이를 들여다보던 서기관은 조용히 서류를 체크했다. 앨런이라는 여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했지만 아레나에 있는 그 누구도 그녀를 위로할 수 없었다.


노예의 임신은 군단에게는 희소식일지 몰라도, 본인에게는 비극이었다. 자식이 딸이면 같은 노예가 되고, 남자면 군단병으로 길러졌다. 남자아이들은 노예인 어머니를 증오하고 경멸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캐시는 미약한 현기증을 느꼈다. 잠시나마 달콤한 평화를 누렸다고 생각한 자신이 저주스러울 정도로 바보같았다.


자신이 앨런이 될 수도 있다.



아니 될 것이다, 별 일이 없다면-이미 빠른 속도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조슈아와 자신의 아이를 군단의 개로 키울 수는 없었다. 시끌벅적하게 칼을 들고 떠들고 있는 남자 아이들과 브라민의 축사를 청소하는 여자 아이 노예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그녀는 결심을 굳혔다. 



나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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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는 간신히 자신의 막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몸뚱아리가 땅으로 꺼지지 않는게 신기했다. 다행히도 오늘 조슈아는, 아니 말파이스 군단장은 간부 회의에 참석하느라 밤 늦게까지 얼굴을 비추지 않을터였다. 지금 상태로 그를 만났다간 그녀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폭발할게 분명했다.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을 때, 억센 손이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

"......캐시 ...?"

선글라스를 쓰고 군단병의 옷을 입은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캐시는 그의 선글라스 너머의 눈동자를 주의깊게 보고나서야 그가 나이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과 한살 터울이었던 작은 오빠, 나이젤. 자신과 같던 그의 연갈색머리는 온데간데 없었고 두상 위에는 문신이 새겨져있었다. 


NAM GLORIA

나이젤은 선글라스를 벗고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둘은 서로가 예전과 지극히 달라져있음을 대화조차 하지 않고 깨달았다. 

"나이젤...오빠?"

"쉿! 이제 나이젤이 아니야. 루키우스라고 불러야해."

"그런게 어딨어. 오빠는 나이젤이야."

"아니라니깐!"

"나이젤 오-"

"닥쳐!"


"누가 소란을 피우는거지?"


저음의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둘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남자였다, 말파이스 군단장이었다.


나이젤, 아니 루키우스는 군단병의 포즈로 꼿꼿이 허리를 세운 다음, 경례를 해보였다.


"이 곳은 방종과 무질서의 온상지가 아니라고 했을텐데."

남자의 목소리에 깔려있는 살의에 캐시는 두려움을 느꼈다. 나이젤이 죽을 수도 있었다. 루키우스라고 부르는게 더 정확하겠지만,

그녀는 웃으면서 말파이스의 혈관이 튀어나온 손을 감싸쥐었다.

"별거 아니-."

"너는 막사로 돌아가."

".......제 오빠에요."



말파이스가 스스로의 분노를 갈무리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캐시와 루키우스의 표정을 통해 내막을 이해하는 데에는 순간이면 충분했다. 





"각자 위치로 돌아가도록. "

짤막하게 명령을 내린 뒤 말파이스는 시저의 텐트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그렇게 짤막한 재회가 끝났다, 아니, 사실은-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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