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후.
캐시 베넷이 아케이드 개넌과 함께 자이온으로 돌아온 것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베가스의 구세주이자 영웅이 된 그녀가 1년 만에 다시 자이온으로, 그것도 의사를 데리고 올 줄 예측한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캐시. 지금 백만 스물 두 번째로 말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이게 진짜 좋은 생각일까?”
“아케이드. 조용히 해. NCR도 네가 여기서 지내는 이상 간섭 안 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이게 최선의 수라고. 내가 얼마나 그 협상안을 끌어내기 위해서 노력한 줄 알아? 그리고 여기 사람들이 얼마나 착하고 좋은데. 네 까탈스러운 성미에도 쏙 들 거야.”
“……..됐다…됐어….그럼 그렇지. 내가 무슨 선택권이 있겠습니까? ”
아케이드는 툴툴거리면서도 배달부의 배려가 고마운 눈치였다. 쑥스러움이 그의 귓가를 붉혔다.
NCR이 베가스의 패권을 쥐게 되자, 난처해진 아케이드의 신변을 보호해준 건 배달부였다. 그녀는 무어대령과 장장 두 시간에 걸친 지리한 협상-이라기 보다는 고성이 오고 가는 살벌한 현장이었지만-끝에 아케이드를 모하비에서 떠나 보내는 조건으로 그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배달부는 아케이드가 낯선 곳에 정착하는걸 돕는다는 명분으로 다시 자이온으로 향했다. 적색의 웅장한 거암들이 몇 백 미터나 높게 치솟아 있는 곳, 하늘이 푸르고, 물은 투명해서 구 시대의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곳. 그녀는 자이온이라는 천해의 땅에 애착을 넘어선 존경심마저 느꼈다. 그런 그녀가 그 곳을 오랫동안-1년이면 황무지 기준에서는 모든 것이 뒤바뀔 수 있는 시간이었다- 방문하지 않았던 데에는 나름의 변명에 가까운 이유가 있었다.
“배달부, 묻겠다. 인간의 본성이 정녕 바뀔 거라 생각하는가? 그건 너의 오만이 아니냐는 말이다. 황무지를 바꿔보겠다는 내 이상과, 한 인간의 운명을 바꿔보겠다는 너의 이상이 얼마나 다른 거지?”
율리시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공멸과 공존은 왈츠를 추는 커플처럼 어울렸다. 서로 뺨과 뺨을 부드럽게 맞대고 발끝을 같은 방향으로 한 채, 끝나지 않는 윤무를 추는 두 사람. 한 박자라도 놓치면 그 순간 우아한 스텝은 엉키고 춤은 끝난다. 파멸이다. 배달부는 자신의 오만함을 또 다른 배달부 앞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의 주사위 놀이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율리시스인가, 조슈아 그레이엄인가, 아니면 자신인가.
그러나 신의 놀이를 한다기에는, 그녀에게 주어진 세상에는 신이 사멸한지 오래였다. 그 자리를 참칭하는 거짓된 광대들은 차고 넘쳤지만. 하우스, 시저, 아론 킴볼… 모든 도덕과 권위가 무너져 내려버린 세상은 그런 광대들의 장기자랑 무대로 전락했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은 그 무대의 소도구로 사용된 다음 손쉽게 버려졌다.
하지만 그녀가 그 규칙을 바꿨다. 배달부는 손수 광대들을 치운 다음 조명을 끄고 무대의 막을 내렸다.
그렇다고 그녀는 자신이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구세주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모든 끔찍한 문제들은 그대로였다. 황무지는 불결했고, 사람들은 죽어나갔으며 세상의 어딘가에는 착취 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숱하게 존재했다. 어떻게 노력해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생각했다, 뉴 베가스에서 자신이 한 일이 어딘가의 누구에게는 증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누군가의 도박판의 카드에 지나지 않는 존재도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증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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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부, 아니 ,, 캐시! 캐시!”
“아케이드..또 왜… 나 잠 좀 자자..”
“내가 여기 도착한 이후로 줄곧 말파-아니, 조슈아 그레이엄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고,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소름 돋아 죽겠어..차분한 사람이라며! ”
“……….조슈아는 모두에게 다 그래. 사람이 붕대에 감겨있고 화상 좀 입었다고 그렇게 호들갑 떨지 좀 마. 모름지기 문명인이라면-“
“그.런.게.아.니.야! 캐시, 네가 어떻게 해명이라도 안 하면 난 다음날 싸늘한 주검이 되어서 저 냇물에 떠내려가는 신세가 될 거라고….! 냇물이 깨끗해서 구울은 안되겠지만-”
“………..무슨 해명을………아………………………”
깊은 수마에서 완전히 벗어난 캐시가 그제서야 호탕하게 웃었다. 그녀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야, 캐시. 조용히..!”
타닥.
그러나 아케이드가 캐시의 입을 막기도 전에 발소리가 들렸다. 둘이 고개를 돌리자, 조슈아 그레이엄이 입구 초입에서 라디오 같은 물건을 들고 서 있었다. 그의 창백한 눈은 캐시와 아케이드를 훑더니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듯이 둘 사이의 허공을 응시했다. 결국 갈피를 찾지 못한 눈길은 천장에 고정된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캐시. 내가 때를 잘못 찾았군. 다음에 내 방으로 오게. 발견한 물건이 있으니.”
조슈아 그레이엄이 -엉켜있는 둘의 모습을 단단히 오해한 게 분명한 듯이- 동굴을 떠나자 아케이드는 진심으로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음산하게 읊조렸다.
“ Sors est saeva…..나 당장 뉴베가스로 떠나는 짐을 싸야겠어. 지금 바로. NCR의 감옥이 여기보다 편할 것같군.”
“………….아케이드. 내가 직접 해명할게.”
캐시는 한숨을 쉬면서 겉옷을 챙겨 입었다. 아케이드 개넌과 자신이 어떻게 저떻게 그런 요상한관계가 되는 건 데쓰클로가 라틴어로 모르몬 성가를 부르는 것보다 낮은 확률이란 걸…. 저 눈치없는 남자에게 어떻게 이해시킬지 고심하면서 말이다.
“-조슈아…”
“………….”
“조슈아, 안자고 있는 거 알아요. 당신 자는 연기 진짜 못하는 거 알아요?”
“…………………………………………….”
조슈아가 계속해서 침묵하자, 캐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뭐, 남자가 서운할 법도 했다. 1년 동안 코뺴기도 비치지 않은데다가, 자이온으로 오자마자 반나절 동안 골아 떨어져 있었던 주제에 의사 양반하고만 떠들고 있었으니.
캐시가 남자의 귀-로 추정되는 부분-에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요. 정말.”
우습게도 남자는 이런 종류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술책에 넘어갔다. 항상 그랬다. 남자는 자신에게 허무할 정도로 약하게 굴었다. 조슈아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캐시는 환하게 웃었다.
“그게 정말인가.”
“네?”
정말 보고 싶었냐고요?
캐시는 대답 대신 손가락 끝으로 그의 입가를 매만졌다. 붕대의 감촉 너머로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었던 자리-을 훑었다.
제가 당신을 두고 어디갈까요?
당신과 나는 모두가 퇴장한 바로 그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거에요. 계속해서, 계속해서. 둘 중 하나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조슈아 그레이엄은 그녀의 속 마음을 간파하기라도 한 것처럼 캐시의 어깨를 끌어안고 여자의 목덜미에 자신의 고개를 파묻었다.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각자의 옷을 빠른 속도로 벗었다. 조슈아의 SWAT 조끼와 캐시의 잠옷이 같이 바닥에 떨어졌다. 캐시가 조슈아의 몸에 올라타자 남자가 웃었다. 여자는 그런 조슈아의 얼굴을 보지 못해서 무척이나 유감이었다. 하지만 눈빛으로도 충분했다. 캐시가 조슈아의 몸 위를 더듬자, 그가 낮게 신음했다. 괴로워서라기보다는 쾌락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에 그녀는 남자의 탄탄한 가슴쪽으로 손을 올렸고, 그의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확인했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까슬까슬한 붕대에 캐시의 피부가 가볍게 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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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가 끝나자 둘은 촛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후희를 즐겼다. 밖은 쌀쌀했지만 이불 안은 온기로 따뜻했다. 캐시는 남자의 쇄골 부근에 자신의 얼굴을 댔다. 따뜻한 체온과 동맥의 박동이 그녀를 차분하게 했다.
"생각해보니, 신기하네. 그 나이에도 아직 팔팔해요?"
"분위기 깨는 데는 천재적이군."
"아니,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이란게 이런-"
캐시의 시덥잖은 말장난은 조슈아의 키스로 무산되었고 그들은 서로 키득거리면서 코를 부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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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전쟁이 변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변해야 한다. 그들이 짊어진 상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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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부는 뉴 베가스의 구원자로 남았고, 그녀의 이름인 캐시 베넷은 뉴베가스가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남을 것이다. 그녀는 인공위성의 잔재를 찾았고, 그 잔재를 통해 새로운 위성을 쏘아올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
불탄 남자의 전설은 점차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졌다. 그 자리에는 조슈아 그레이엄의 이름이 새로 일어서게 되었다.
시저의 군단은 후버댐에서 패퇴한 후 세력이 급감했고, 내분 끝에 완전히 기울었다.
NCR은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부족민 출신 정치인이 다음 대선 출마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건라이트는 더 이상 군단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아케이드 개넌은 자이온에서 부족민들의 역사를 공부하는데 몰두한다. 그의 저술은 황무지에서 널리 퍼지게 된다.
베로니카 산탄젤로는 배달부의 설득 끝에 그녀의 인공위성 프로젝트에 동원(?)된다. 그녀는 행복해보인다.
렉스는 자신을 완전히 받아들였고, 프리사이드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지미 핸론은 레딩에서 목장을 운영한다. 그는 여전히 말이 많다.
크레이그 부운은 저격대대에 재가입한 뒤, 자신만의 정의를 실현하는 중이다.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말이다.
분필 자국 따라는 종종 캐시를 따라 뉴베가스로 여행을 가곤 한다. 그는 여전히 자이온을 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전쟁은, 전쟁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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