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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5-2

복수는 나의 것 5-2

I know you.

You're the one I've waited for.

Let's have some fun.

Life is precious.

Every minute.

And more precious with you in it.

So let's have some fun.

We'll take a road trip.

Way out West.

You're the one.

I like the best.

I'm glad I found you.

Like hanging round you.

You're the one.

I like the best.



첫 키스 이후로 여자와 남자는 종종 입을 맞춘다. 군단장의 막사에서, 때로는 캐시의 막사에서. 입맞춤은 정중하지만 심심하지는 않다. 여자는 생각보다 열정적인 그의 모습에서 희열을 느낀다. 어느 날들은 그런 순간이 평소보다 길다. 특히 '그' 날은 유독 그랬다. 입맞춤이 끝나자 캐시가 그의 색소 옅은 눈에서 들끓는 욕망을 읽어냈다. 그녀의 호흡도 가빠졌다. 그는 캐시가 옷을 벗어내는 것을 거들면서 자신의 방탄조끼와 옷 역시거칠게 벗었다. 둘이 웃옷을 전부 벗자 남자는 캐시의 어깨를 감싸면서 듣고 싶다는 대답이 있다는듯이 여자를 바라봤다.


“왜 망설이는 거죠.”



“진심이야?”

그녀는 쓰게 되뇐다.

“내가 노예가 아닌 것처럼 기만하는 데에는 당신만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없을 거야.”

하지만 캐시는 분별력 있게도 그런 말을 내뱉지 않는다.

대신에 그녀는 웃는 것을 선택한다. 가지런한 이빨을 드러내며.



“당신이 좋아요.”



남자에게 그 말은 어떤 사랑 고백보다 유혹적이다. 좋아한다는 말을 여자가 발명해낸 것 같은 착각이 그의 머리를 때린다.

둘은 군단장의 침대에서 사랑을 나눈다. 남자가 삽입을 하자 여자가 탄성을 지른다. 남자의 움직임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린데, 캐시는 그것이 의도적임을 안다. 그녀가 남자의 선 굵은 어깨를 깨물자, 남자가 웃는다. 남자는 캐시 귀에 속삭인다.


“조슈아, 그게 내 이름이야.”


그는 그녀 안에서 열락을 느낀다. 그렇게 밤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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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이름을 부르느라 목소리가 다 쉬었어요.”

캐시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조슈아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가져오면서 말한다.

“원래도 허스키한데.”

“조슈아.”

“…………..”

‘진짜’ 이름을 부르면 얼굴이 붉어지는 남자가 귀엽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좋은 이름인 것 같아.”

“그런가.”

“적어도 말파이스보다는 낫죠.”

“어이가 없군. 신경써서 지은 이름인데.”

“부모님 쪽이 더 감각이 좋았던 것 같은데요.”


조슈아와 캐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위성과 교신할 수 있다는 그녀의 믿음을 남자는 비웃지 않는다. 남자는 자신이 햇병아리 선교사였을 적의 이야기를 한다. 그 이후로 자신이 저지른 과오와, 타협들에 대해서 고해성사하듯이 술회한다.

그녀는 그 순간만큼은 그를 판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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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의 부족어를 배우려면 글을 쓰는 게 가장 좋다고들 해서 시작해본다. 어떻게 시작해야 되나. 나는 분필 자국 따라. 죽은 말 부족의 일원이다. 일원..이렇게 쓰는게 맞는건지 모르겠네. ㅇ ㅣ ㄹ ㅇ ㅜ ㅓ ㄴ.

내가 이 언어 쓰는 법을 배우게 된 건 조슈아 덕분이다. 사실 이전부터 말하는 방법은 알고 있었지만, 조슈아가 책을 읽는 걸 보고 나도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읽는 방법을 배운 뒤부터는 직접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조슈아가 읽는 것은 성경이다. 성경이란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약속에 대한 이야기라고. 다 좋은데, 구원이라는 말은 솔직히 이해하기 어렵다. 죽은 사람을 하늘에서 끌어올려준다는 이야기는 조슈아가 믿기에는 너무 바보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조슈아는 정말 구원 받은 걸지도 모른다. 불에 휩싸인 채로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멀쩡히 살아있으니까!

하지만 조슈아는 많이 아프다. 붕대를 갈 때마다 신음을 참는다. 매번 다시 불에 타는 느낌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걸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어렸을 적 모닥불에서 장난 치다가 손가락을 데인 적이 있었는데, 정말 아팠다! 온몸에서 그런다고 생각해보라! 정말 무서울 것이다.

조슈아가 아픈 것은 몸뿐이 아닌 것 같다. 슬픔족의 샤먼이 그랬다. 조슈아는 마음 속에 구멍이 있다고. 그래서 그 구멍을 통해서 슬픔이 나오는 거라고. 불에 타는 것도 힘들 텐데 마음 속에 구멍이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에 대해서 대니얼에게 몰래 물어본 적이 있는데 (대니얼은 절대로 누구한테 비밀을 이야기할 사람이 아니다.) 대니얼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조슈아는 용서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시저의 군단을 왜 용서해야하는 지는 모르겠다. 뉴가나안인들을 죽인 것도, 하얀다리 부족이 우리를 공격하게 만든 것도 시저의 군단이다, 라고 했더니 대니얼은 고개를 저으면서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 당하는 건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일이야.”

흠……. 잘 모르겠다. 대니얼은 깊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상하다. 문제는 맡길 수 있는데, 슬픔은 왜 못 맡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p.s 며칠 뒤면 해피 트레일 상단이 지나갈 것이다. 조슈아는 하얀다리 부족의 공격을 걱정하면서 나에게 정찰을 잘 해두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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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확실해. 불탄 남자가 조슈아 그레이엄이야.”


“잠깐, 그래서 넌 지금 그 남자를 찾으러 가겠다 거야? 정신 나갔어? 그 사람이 네 은인일지, 원수일지 어떻게 알아!”


“나도 저 안경씨와 같은 생각이야. 기억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막무가내로 가는 건 매우 극도로, 엄청나게- 비합리적인 선택이야. ”


 킹이 내어준 방 한 켠, 전쟁 전의 칠판을 앞에 두고 아케이드, 베로니카 산탄젤로, 그리고 배달부가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부운은 다 시끄럽고 짜증난다며 렉스와 함께 산책을 나갔고 남은 셋은 <배달부의 미래: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100분 연장 토론 중이었다.


칠판에는 조슈아 그레이엄 = 말파이스 = 불탄 남자 (??) -???->배달부

등의 도식이 그려져 있었다.

“아케이드, 우리 의제를 정해보자.”

“정할 것도 없어. 이건 자살 미션이야. 나는 안가, 못가.”

“어차피 나 혼자 갈 생각이었어.”

“그 말파이스 군단장이란 놈의 흉악함에 대해서 네가 기억을 못하는 것 뿐이야. 그자가 얼마나 무섭고 빠른 속도로 서부를 정복했는지 알아? 그자는 '사신'이었어. ”

베로니카가 아케이드 말을 슬쩍 거들었다.

“이건 안경씨가 맞아. 아무리 생각해도 너랑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을 것 같다고. “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어.”

베니와 하우스를 찾아갔을 때, 그녀는 실망과 직면해야 했다. 다들 자신의 야심과 치기 어린 호승심으로 뒤범벅인 어린아이들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듯했다.


“베로니카, 아케이드. 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기억을 찾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NCR, 하우스, …그리고 예스맨 사이에서 배달부는 갈등 중이었다.시저의 군단은 애초에 선택지에서 논외였다. 그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라고는 한 톨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페스 인컬타의 교활한 목소리만 들으면 분노가 치밀었고 시저는 아케이드의 말마따나 자아비대증 환자였다. 어쩌면 선입견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닙튼의 광경에서부터 그녀는 자신이 군단을 싫어했다는 사실만은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정 나랑 원수면 내가 죽이고 오면 되고. 일석 이조 아니겠어?”


아케이드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안경이 이마 위로 올라갔다.

“배달부, 내일이라도 군단은 댐을 정복하러 올 수 있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없어.”

“NCR을 믿는 건 아니지? 그 놈들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

베로니카가 추궁하듯 배달부를 몰아세웠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믿을 수밖에 없어. 엘더 맥나마라는 나에게 빚이 있고, BOS가 NCR과 힘을 맞춘다면 현재의 균형은 당분간 유지될 수 있을거야. 게다가,

시저는 내가 하우스를 죽이러 갔다고 믿고 있어. 오랫동안 기다릴 거야. 지 딴에는 말이지. 시간은 오히려 지금 밖에 없어”

“NCR과 동맹?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렇게 될 거야. 베로니카.”

배달부가 서기관을 쳐다봤다. 그녀가 위엄있고 냉혹한 눈빛을 보내자, 베로니카는 몇 번 발을 구르더니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아케이드는 계속해서 손에 얼굴을 파묻는 중이었다.

아케이드는 배달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빨리, 아니 살아서 돌아와야해.”

“물론이지.”





부활한 사람은 다시 죽지 않는다고.



그녀는 45구경 자동권총에 탄창을 넣었다. 

다음 발이 정확한 장소에 꽂히길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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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5

복수는 나의 것 5

“이것 한 가지는 확실하다.

복수를 꿈꾸는 사람은 상처를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한다.

그러지 않으면 상처가 아물고 멀쩡히 살아가게 될 테니까.”

프란시스 베이컨

-







칠흑 같은 밤과 새벽의 사이, 보초들 외엔 모두 숨죽여 자고 있는 시간, 말파이스는 막사 앞을 지나가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그의 예민한 청각은 그것이 보초병이 아닌 여자의 것임을 감각했다. 그는 총을 허리춤의 홀스터에 끼워둔 채로 나갔다.



캐시의 막사 안을 들어가자마자 침낭이 비어있음을 깨닫고 순간 그는 심장이 추락하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침낭에 남아있는 온기로 봐서 그녀가 나간 지는 반시간이 채 되지 않았을 터였다. 빨리 찾아야만 했다.



‘그 전에 병사들에게 잡힌다면’



십자가에 매달린 캐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다. 괴로움의 기저를 미처 파악할 겨를도 없이, 그는 막사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바로 그 순간 자신보다 작은 물체와 부닥쳤다.



말파이스는 자신의 가슴팍에 묻힌 따뜻하고 부드러운 뒤통수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캐시였다.  



“헉! 군단장님!”


“캣.”


“ 왜 여기 계세요? “


저는 화장실을 가려고…. 캐시는 허리 뒤에 물체를 숨기며 어색하게 얼버무렸다. 말파이스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으………..”

“캐시.”

캐시가 마지못해 내민 것은 일전의 그 라디오였다. 자신이 며칠 전 신디사이저를 구해준 것이 생각났다. 고철 운반상을 통해 어렵게 구한 물건이었다.

“도대체가…”

“막사 밖에선 신호가 좀 더 잘 잡힐 줄 알고… 잠시 시험해보려고 했는데. “

그게 뭐 큰 잘못이라도 되나? 캐시의 당당하다는 표정에 말파이스는 살짝 부끄러워졌다. 지레 겁을 먹고 부산을 떤 자신이 좀 꼴불견이긴 했다.

말파이스의 수치심을 눈치챈 캐시는 그를 달래는 것처럼, 라디오를 황망히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잠 다 깨신 것 같으니, 멋진 거 구경시켜드릴까요?”


캐시에게 이끌려 막사 뒤로 나가자 보초들도, 군단의 텐트도 보이지 않는 캠프 후미의 풍광이 보였다. 광활한 사막, 아무것도 없는 죽어버린 땅. 얼떨떨해하는 말파이스의 어깨를 치면서 캐시는 하늘을 가리켰다.


“뭐 특별한 거라도.”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에요. 저기 목성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물체 보이세요?”


“흠..모르겠군.”


“제 짐작이 맞다면 저건 우주 정거장이에요.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세 번째로 밝은 물체,라고 옛날 항공우주잡지에서 그랬거든요.”


하늘을 떠도는 인공 별들의 이야기는 말파이스도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주 정거장이라니? 카라반 스테이션 같은 것인가. 한 때 선조들이 달을 넘어 화성까지 진출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책으로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 때 자신은 경외감보다는 한계 없는 인간의 본능에 몸을 떨었던 같다. 

또 다른 정복지.

미개척의 황야.

인류가 충분히 운이 좋다면, 저 빛나는 점까지 다시 도달해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대가를 치러야겠지. 썩 아름다운 모양새는 아닐 터였다.



“보세요! 움직이고 있어요!”


캐시가 조용히 흥분 어린 감탄사를 내뱉었다.


말파이스는 순수한 기쁨으로 눈을 반짝이는 캐시를 말 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하늘 위로 매끄럽게 움직이는 작은 빛을 잠시 지켜보다가 남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다. 캐시는 손가락 끝으로 말파이스의 턱 끝을 더듬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서로에게 다가갔고 입을 맞췄다.  



캐시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았다. 말파이스는 캐시가 부서지기 쉬운 도자기 인형인 것마냥 조심스럽게 여자의 상체를 안았고 둘의 입맞춤은 깊어져 갔다. 캐시는 남자의 입술이 거칠고 따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남자가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았다. 자신이 그를 원하고 있다는 것도.



키스가 끝나자, 둘은 산소가 부족한 듯이 숨을 몰아 쉬었다. 캐시가 헝크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나서야 남자가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어왔다.







-





조슈아, 조슈아 그레이엄.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 당신은 오늘 내게 핀드들이 있던 볼트에서 핍보이를 찾아왔다고 했지. 당신은 그런 식으로 출정을 다녀올 때마다 하나씩 무언가를 가지고 오더라.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냐, 사실 난 굉장히 기뻤어. 생각해보면 우리가 입맞춤을 하고 같이 자기 시작한지 벌써 1년이 지났는데, 당신은 늘 나를 놀래키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아. 좋은 쪽으로 말이야. 하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야. 


나는 어렸을 때부터 건라이트에서 자랐어. 아버지는 상냥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좋은 남자였지. 어머니는 총을 잘 다루셨고, 목장의 안전을 책임지셨어. 언니와 오빠들은 나를 이뻐라했는데, 나는 그것 때문에 항상 기고만장해있었던 같아. 버릇 없는 꼬맹이었지. 나는 기계들을 조립하고 만드는 걸 좋아했는데 아버지는 그걸 좋아하지 않았고,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 딸이 성인이 되었으니 빨리 결혼을 해야 한다고 철썩 같이 믿었거든. 하지만 난 도통 구미가 당기지 않았어. 별로 믿을만한 사람도 없었고. 대신 나는 묵시록의 추종자들을 따라갈 생각을 몰래 하고 있었지.

그 때, 당신들이 건라이트를 공격했을 때, 어머니는 전장에서 마체테에 복부를 찔려 돌아가셨어. 나는 그걸 멀리서 지켜봐야만 했지. 용병단들은 전부 도망가고 마을 사람들은 포로로 잡혔어. 우리들은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정말 맥빠지는 패배였어.

그리고 울페스 인컬타가 우리 앞에 나타났어.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밤이면 밤마다 내 머릿속에서 울려.

“로터리를 시작하겠다.”

마을 사람들 한 둘이 그렇게 십자가에 박히고, 마을의 대표로 지목된 아버지가 끌려 나오자 그가 외쳤어.

 “제겐 여식이 2명이고 쓸모 있는 아들놈이 셋이나 됩니다요. 제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어떻게 해도 좋습니다!”

아버지가 그토록 비굴한 모습은 처음 봤어. 군단이 오건 말건 땅을 지켜야한다는 의지로 불타던아빠가 아니었지. 우리가 경악에 질리건 말건 그는 눈물까지 흘리며 애원했지. 제발 자신은 로터리에서 빼달라고,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고. 땅과 자식들을 전부 바쳐서라도. 우리 아버지는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어. 아무리 바꿔보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야.

가장 먼저 못 박힌 건 콜린 오빠였고 큰오빠는 아버지를 저주하면서 죽어갔지, 그 다음은 딘 오빠. 나이젤 작은 오빠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 아마 라니우스나 루시우스의 캠프에 있지 않을까? 오빠를 찾을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아서, 나는 당신에게 말도 하지 못한 거야. 로레인 언니는 나랑 같은 막사에 있다가 얼마 안가 병에 걸려 죽었어. 행군을 하다가 일어난 일이었지.

 

울페스 인컬타는 아버지를 놔주는 척 했지, 그리고 아버지가 저 멀리 줄행랑을 치자 뒷모습을 향해 총을 쐈어. 그대로 아버지의 형체가 꺼꾸러졌고 정적이 흘렀어.

내가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



당신을 너무 사랑해, 그래서 당신을 증오해. 그 사실은 바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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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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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a song someone sings,

Once upon a December.

Someone holds me safe and warm,

Horses prance through a silver storm,

Figures dancing gracefully across my memory

Far away,
Long ago,
Glowing dim as an ember,
Things my heart used to know,
Things it yearns to remember
And a song someone sings






모하비의 계절은 대체적으로 끔찍하다. 아니, 흉악하다는 말이 더 적합하겠다. 여름에는 40도 이상 올라가고 겨울에는 영하로 곤두박질 친다. 밤에는 모래바람이 불고 낮에는 뜨거운 햇빛이 지상의 생명체를 멸하려는 것처럼 열기를 내뿜는다.

시리는 뉴멕시코를 그리워했다. 적어도 겨울에 이 정도로 추운 곳은 아니었다. 뉴멕시코는.

그리고 집이었던 곳이, 그곳에 있었다. 시리는 이제는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이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을 생각했다. 그녀는 1년 전, 노예 생활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이 살아있을 거란 희망을 힘겹게 죽였다. 서부는 황량했고, 폭력을 휘두를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잡아 먹히는 게 순리였다. 그녀가 그랬듯이.



술 취한 군단병들의 대거리를 하던 그녀는 시저의 캠프에서 걸어 나오는 여자의 형체를 확인했다.


‘그 유명한 배달부인가.’

배달부는 군단 안에서 꽤 화제가 되는 인물이었다. 불탄 남자 정도의 열광은 아니었지만, 준수한 외모와 날렵함으로 ‘그나마’ 인정받는 유일한 여자였다. 몰론 순수한 인정이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했다. 군단원들에게 있어서 여자는 인간이 아니었으니,  배달부를 입에 담을 때마다 그들 사이에 상스러운 말들 역시 오고 갔던 것이다. 하지만 시리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배달부를 경외하고 싶어도, 편협함 때문에 그럴 방법조차 떠올리고 있지 못하다는 걸 말이다. 



소문에 의하면 여자는 머리에 총알을 맞고도 무덤에서 기어 나왔다고들 했다. 게다가 좀 더 믿을 만한 울페스 인컬타의 보고에 따르면, 톱스 카지노의 사장을 유혹한 다음 칼로 찔러 죽인 것도 그녀였다. 시저가 그녀를 직접 부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부활이라. 불탄 남자와 비슷하네.'


노예들이 회상하는 불탄 남자의 이미지는 상반된 진술들로 얼기설기 이어붙여져있었지만 그만큼 생생하고 강렬해서, 시리는 실제로 그를 지켜 봐왔던 것 같은 착각을 하기도 했다.

 노예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선망한 나머지, 그 불탄남자가 하늘에서 벼락과 함께 종말을 불러오고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라고 믿는 것 같았다. 시리는 그 선망에 선뜻 동참하지 못하면서도 마음 한 켠으로는 그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죽여버린 줄만 알았던 희망이 사실은 죽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어.’

‘도를 넘는 사람은 군단병이어도 죽이는 냉혈한이 바로 불탄 남자였지. 그리고 공정했고. NCR 레인저 수십병이 그를 죽이러 움직였는데, 총알을 몇 발 맞아도 멀쩡했어. 불사신이었다고.’

‘그는 전쟁 전 선전에 나오는 멀끔한 장교처럼 생겼는데, 화를 낼 때는 야차 같았어.. ’

‘불탄 남자가 있는 동안은 견딜 만 했지. 그가 간 이후로는……모든 것이 진창으로 떨어졌지만.”




“저기…”

시리는 불탄 남자와 관련된 상념에 빠져든 나머지 배달부가 자기 가까이에 와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지근거리에서 본 배달부는 강인함과 순진함이 뒤섞인 눈동자와 균형 잡힌 이목구비를 가진 여자였다. 누카 콜라 광고의 선전에 나오는 미인들 같은 화려함은 없었지만, 전쟁 전의 고상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까지 오는 연갈색 머리는 한눈에 봐도 결이 좋았다.

“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자유민인 여자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거든요.”

“ 아. ……..”

“네. 여기서 여자는 전부 노예죠. 당신은 시저의 허가가 있으니 안전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요. 군단병들이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어요.”

배달부의 얼굴에 짧게 분노가 스쳤다 이내 사라졌다.



“………..몇 가지 질문을 해도 좋을까요?”

그녀는 시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군단에서는 왜 스팀팩을 쓰지 않는지 등의 잡다한 질문을 했다. 시리가 나름 성의 있게 대답을 해주자 그녀는 짧게 고마움을 표한 후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속삭였다.




“…….불탄 남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나요?”

시리는 그제서야 전의 질문들은 의혹을 덜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리의 등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배달부의 절실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고 나서야 그녀는 눈 앞의 이방인이 진심으로 묻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배달부는 모처럼 혼자였다. 군단의 캠프에 들르면 항상 진이 빠졌고 렉스에게도 자신의 지친 모습은 보여주기 싫었던 탓에 룸에는 그녀 뿐이었다. 배달부는 쳐진 기분을 달래고자 핍보이로 음악을 틀었다. 구슬픈 재즈 음악이 주로 나오는 이름 모를 미스태리한 채널에 다이얼을 고정한 그녀는 노래의 멜로리를 흥얼거리다가 문뜩 침대에서 일어나, 방 한가운데에 섰다.

전쟁 전의 고색창연함을 퇴색되었을지언정 구슬프게 간직한 고모라의 스위트 룸. 그 한가운데에 서서 그녀는 양 팔을 뻗었다. 상상의 상대방과 손을 마주잡는 포즈를 취한 다음 스텝을 밟아나갔다. 자신이 어디서 배웠는지는 모르는 발걸음으로 노래의 리듬에 맞추어 몸을 움직였다.



하나 둘.

하나 둘.

재즈의 선율에 맞춰 그녀는 춤을 췄다.

유령과 춤추는 기분이군.




‘집중해.’

낮은 남자의 목소리에, 그녀는 동작을 멈추고 방을 둘러보았다. 





------------------






“음……….”


“무슨 일 있나.”

캐시는 뒤에서 불쑥 다가오는 남자 때문에 손에 든 수제 라디오 mk2. 를 떨어뜨릴 뻔했다.

“… 별 건 아니고..”

어서 말해보라는 듯이 말파이스가 고개를 까닥였다.

“이 라디오가 잘 작동은 하는데, 단파 수신기가 없어서…”

“단파 수신기?”

“네. 단파 신디사이저 수신기가 있으면 동부와 저 멀리 대륙 너머의 방송까지 들을 수 있거든요.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수신기가 지금은 없어서…”

중언부언하면서도 신나게 말을 이어나가던 캐시는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물론 구하기 어려운 거니까. 기대할 수 없..”

“찾아보지.”

“그러실 필요는 없을텐데….요…?”

남자의 침묵을 통해 캐시는 그 어떤 말로도 그를 설득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의 호의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느닷없고 진중한 형태로 그녀에게 주어졌다. 부담스럽기보다는 형용 불가능한 기묘함이 서려있다고 해야하나.

말파이스가 자신의 라디오를 내려다보자 캐시는 그가 좀 더 잘 볼 수 있게 라디오를 들어 올렸다. 핍보이 처럼 생겼지만 라디오의 기능만 하는 엉성한 물건이었다. 그녀가 다이얼을 돌리자 노래가 흘러나왔다.

도리스 데이의 <dream a little dream of me>였다.



그녀가 라디오를 서류 책상 위에 올려놓자 달콤한 가수의 음성이 막사를 가득 채웠다.

Stars shining bright above you

Night breezes seem to whisper "I love you"

Birds singing in the sycamore trees

Dream a little dream of me


캐시는 멍하니 서있는 말파이스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단단한 근육으로 이어진 팔이 잠시 움츠려 들다가 그녀의 손길에 긴장을 푸는 것이 손가락 끝으로도 느껴졌다.

“………………..”

“춤 춰본 적 있어요?”

“…….물론. 나도 ‘삶’이란게 있었어. 놀랍게도 말이지.”

“놀랍네요. 정.말.”


캐시의 비꼬는듯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말파이스가 짐짓 눈썹을 찡그리는 시늉을 했다. 여자는 그 모습이 어쩐지 좋아 보여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가 장난스런 표정을 짓는 걸 볼 기회는 드물었다.

“그럼, 경험도 많으시니까 한번 가르쳐주시죠?”



노예의 어처구니 없는 하극상으로 비춰질 것을 알면서도 말파이스는 캐시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불가항력에 이끌리듯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노래가 바뀌는 것도 잊은채 그들은 계속해서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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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소설에는 폭력적인 묘사와 성폭행미수의 묘사가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Begin again in the night

Let's sway again tonight

Your arm on my shoulder

Your cheek against mine

Where can we go

When will we find that we know.



캐시는 남자의 너른 등을 본다. 침묵을 유지하며 부산 떨지 않는 뒷모습을 주시한다. 남자는 30분 가량 모하비로 추정되는 지역의 지도를 말없이 보고만 있었고 캐시는 남자가 준 라디오의 부품을 바닥에 늘어놓고 그것들을 연구하는 척 하는 중이었다. 기계를 구하기 어려운 군단의 환경을 생각해보면, 호사스럽기 그지 없는 재료들이었다. 둘만 남겨져 있는 시간은 대개 이런 식으로 고요했다. 각자 공유된 침묵 속에서, 세상의 너저분함과 거리를 둔 채 휴식을 취하는 식이었다. 남자도 캐시도, 그것을 기꺼워했다.



남자의 곁에서 일하게 된지 세 달이 지났을 때, 그녀는 슬프게도 자신이 운이 좋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남자가 베풀어준 저의 모를 호의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했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비참함과 안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자신이 말파이스를 죽였더라면 상황은 남은 자들에게 더욱 지독하게 돌아갔으리라. 노예들은 책임 지워진 채 학살당하고 십자가에 박혔을 것이며, 그가 없는 군단은 고삐 풀린 브라민처럼 더 큰 소요와 죽음을 일으켰을 것이다.



남자는 잔인했지만, 역설적으로 필요한 만큼 잔인했다. 괴물-라니우스라는 이름을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이 목숨을 거둬가는 데에서 희열을 느끼는 족속이라면, 그는 마치 농부가 벼를 수확하듯이 필요한 만큼의 목숨을 거뒀고, 거기에 어떠한 유희도 괴로움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남자는 지도를 반듯하게 접은 뒤에 캐시 가까이로 다가갔다. 거대한 석상이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받으며 캐시는 어깨를 움츠렸다. 뼈와 피, 잔근육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존재. 캐시가 고개를 돌리자 멀끔한 남자의 얼굴이 살짝 움찔거렸다. 웃으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웃지 않는다. 대신 색소 옅은 눈동자로 그녀를 눈에 담을 따름이다.


“군단장님.”

“조립은 잘 되가나.”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결연하게 고개를 마주 끄덕인다. 남자는 단정하게 정돈된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기술은 어디서 배운 거지?”

“전쟁 전 잡지를 좋아했어요. 카라반에 실려서 넘어온 것들은 될 수 있는 대로 구해서 읽었구요. 제멋대로 익혔죠. ”

“혼자서 배우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묵시록의 추종자들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도 했었죠. 아버지는 절대 허락 안 했겠지만.”

“무기는 다룰 수 있나.”

“아뇨. 전혀 몰라요. 아시잖아요. ……”

그녀가 씁쓸한 미소를 짓자 남자는 그녀 옆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는다.

“이건 45구경 자동권총이다.”

캐시가 도대체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고만 있자, 남자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고 다른 손으로 권총을 쥐어준다. 그녀의 손이 남자의 커다란 마디 굵은 손과 겹쳐진다.

여자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갑다면, 남자의 것은 불처럼 뜨겁다. 손의 감촉과 열기에 여자가 당황한다.

말파이스는 말을 이어나간다. 진중하고 사려깊은 톤으로.


“총을 쏘는 법을 가르쳐주지. 쉬울 거야.”








-------------


여자는 튀지는 않지만, 미인이다. 말파이스는 쓰라리게 그 사실을 인정했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니 역시 꼴사납기 짝이 없었으나 그녀의 반듯한 미간과 신중한 눈빛을 볼 때마다 그는 그런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캐시보다 아름다운 여자들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열중하는 얼굴로 자신의 잔상처를 소독하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그는 마음 한 켠이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집중은 그 누구도 깰 수 없을 성 싶었다.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해있는 여자를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는 자신보다 많은 책을 읽은 것 같았다. 황무지의 교육 수준과, 자신이 모르몬 공동체에서 받아왔던 혹독한 지적 훈련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었다. 말파이스가 성경 구절을 중얼거리면 그 다음 구절을 매끄럽게 받아냈고, 군단의 움직임을 몇 수 앞서 기민하게 파악해내는 능력이 있었다. (물론 말파이스에게 참견하는 일은 없었지만.) 수다스러운 편은 아니면서도 한번 말을 걸면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재주도 있었다. 주로 전쟁 전에 있었던 역사의 한 토막이나 자신이 만들었던 기계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노예가 되기에는 아까운 여자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것을 그녀에게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헛된 희망으로 그녀를 고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단 밖으로 나가면 그녀는 며칠도 지나지 않아 핀드들에게 갈기갈기 찢겨질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핀드들 아니면 도마뱀들이, 도마뱀들이 아니면 모래바람이 그녀를 짓이겨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전쟁 전에 지어진 볼트 안에서나 간신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몽상가였다. 올드 월드 블루스. 과거에 사로잡힌 채 버려진 땅에서 지내지 못하는 사람. 시저가 가장 경멸하는 부류의 인간.





하지만 말파이스는 그녀를 통해 과거의 아름다운 광경을 엿보는 유혹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의 깨끗한 치열과 부드러운 입술에서 나오는 과거의 이야기들에 그는 점차 중독되어갔다. 자신도 모르는 채로.



------------------------------------







그녀가 군단장의 심부름을 하러 막사 밖으로 나왔을 때, 비쩍 마른 군단병 하나가 그녀의 앞을 막았다.

“ 네가 군단장님의 창녀지? “

“…………뭐라고?”

“말대꾸하는 것 봐라. 자기가 officer’s wife인 줄 알고 있어!”

캐시는 군단병의 얼굴을 보고 그가 완전히 술에 취해있는 상태임을 알았다. 군단 내에서 음주는 엄격히 금지되고 있지만 하급 군단원들 사이에서는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보나마나 핀드들의 소굴에서 쟁여온 거겠지.

군단병 하나가 소란을 일으키자, 다른 이들도 가세하기 시작했다. 캐시는 그들의 얼굴에 서린 적의에 몸이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씨팔. 네년은 스스로 귀족이라도 된 것 같지? 우리들이 피땀 흘려 일하는 동안 가랭이나 벌리고,아양 떨면 되니까! ”

군단병의 입에서 나오는 추잡한 말에 캐시는 갑자기 냉정을 되찾았다.


저런 헛소리에 절대로 대꾸해서는 안 된다.

‘저 자식은 내가 화내기를 고대하고 있어. ‘


캐시가 원하는 대로 반응하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유지하자 군단원들의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해졌다.


“보에티우스! 저 년 맛 좀 보자!”

군단병 하나가 그녀의 팔을 잡아채며 끌고 가려 하자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그의 팔을 물었다.팔뚝의 살점이 뜯겨져 나가며 군단병은 비명과 함께 물러섰고 소란은 캠프 전체로 확산되었다.

말파이스가 소란의 중심지로 불려오게 된 것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캐시가 돌아오지 않아, 밖에 나가 그녀를 불러올까 고민하던 차에 일이 그의 귀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일방적으로 군단병의 입장에서 진술된-사건의 전모를 들은 말파이스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붉어졌다. 캐시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고 그녀의 입술에는 군단병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가 묻어 있었다.


당장 피를 닦아내고 싶은 충동과 싸우며 남자는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노예는…… 군단의 소유물입니다!.. 저런 여자-“

탕.


말파이스가 총을 꺼내 군단병에게 쏜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심지어 조준 대상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군단은 무절제와 방종의 온상지가 아니다.”



한마디만을 남기고 남자는 캐시를 부축한 채로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







그 뒤로 차가운 불꽃 같은 말파이스 군단장이 노예 여자에게 푹 빠져있다는 이야기는 몸집을 부풀려 갔고 말파이스가 어찌할 새도 없이 소문은 시저의 귀까지 들어갔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자네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서운하군”

“아. 다 헛소문일세. 와전된 게 분명해.”


“내 앞에서는 조금 솔직해져도 괜찮지 않나? 얼마나 끝내주는 여자인 거지?”





말파이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캐시에게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는 입을 다무는걸 선택했다. 솔직한 심경으로는 에드워드, 시저 앞에서 그녀의 이야기가 오르내리는 것이 불쾌하기도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소문을 옮기는 족속들을 전부 십자가에 매달고 싶었다.



“뭐, 자네가 부끄러운 것도 이해할 수 있지. 하지만 가끔은 긴장을 푸는 것도 중요해. 자네는 항상 너무 뻣뻣해있지 않나. “



시저가 됐다는 듯이 말파이스의 어깨를 툭툭 친다.



시저는 말파이스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봐야 할지 예의주시해야 할지 가늠한다. 그의 두뇌는 항상 신속하게 경중과 손익을 따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말파이스, 아니 조슈아 그레이엄은 그가 쉬이 계산해낼 수 있는 변수가 아니었다.




카드가 될 수는 있겠지.

시저는 친우의 웃음을 가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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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깨어났어요? 좀 어떠세요?”



캐시가 정강이의 붕대를 갈던 와중에 그가 일어난다. 창백하지만 약간의 혈기를 띤 그의 얼굴에 여자는 안도와 실망감을 동시에 느낀다. 두 감정은 제대로 분리되지 않은 채 그녀의 마음 속에 침잠한다.


“며칠간 의식 불명 상태였어요. 사람을 불러올까요?”


“…….됐다.”



말파이스 군단장은 기가 차지도 않는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보나마나 자신의 부하들은 겁을 집어먹고 노예를 희생양으로 세운 것이리라. 하필이면 저 여자를.

군단장이 의식을 갈무리하는 동안 캐시는 따뜻한 정화수를 그의 앞에 가져다 준다. 일어설 힘이 없는 그를 온 힘을 다해 부축하고 겨우 물을 먹인다. 여자는 새삼 그의 단단함을 실감한다. 여자의 손 위로 단단한 등 근육과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군단장이 의식을 차리자 이윽고 부관들이 막사 안을 시끌벅적하게 만든다. 말파이스는 짜증을 내며 그들을 물리고 캐시만을 옆에 둔 채로 잠을 청한다. 캐시는 군단장이 의식을 잃는 일이 없도록 확인하는 일을 맡지만 그건 명목상의 일이고 실제로는 말파이스가 하지 못하는 잡무를 도맡아 처리한다. 보급품의 양과 항목, 군인들의 훈련사항을 말파이스에게 소리 내어 읽어 주고 그의 명령을 문서화한다. 자신을 죽일 뻔한 노예에게 이런 일을 맡기다니 고비를 몇 번 넘기고 나서 정신이 이상해진 건가 싶지만 , 캐시는 군소리를 하지 않는다. 노예 생활의 좋은 점은 군단원들의 불가해한 의식구조를 체념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좋은 점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너는 똑똑하군.”

“……..예?”

말파이스가 업무 외의 일로 말을 건 건 처음인지라 캐시는 살짝 긴장한다.

“보급품 양을 계산하는 속도가 빨라. 어려운 단어들을 정확하게 발음하고 지시사항을 해석하는 능력도 있어.”

“…………..”

“지성은 황무지에서 드문 덕목이지.”

캐시는 남자의 언중을 파악하려 애쓰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지성은 말파이스의 창백한 파란 눈 앞에서 무력화된다. 남자의 눈에는 색소가 부족해서 마치 감정이 결여된 것처럼 느껴진다. 군단장의 깔끔한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여자는 겸손하게 대꾸하려 애쓴다.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

“고맙다는 이야기는 안 하는군. 솔직해서 좋아.”


“……………………”


“앞으로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말파이스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다. 모든 것이 그렇게 쉽게, 군단장의 혀끝에서 이루어진다.


Roma die uno non aedificata est.


캐시의 막사는 말파이스의 옆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군단장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뒤부터 그녀는 비공식적으로 그의 명령과 지시를 기록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군단원들은 불만을 표하다가도 말파이스의 말이 가지는 힘의 권위에 감히 저항하지 못한 채 궁시렁 거릴 따름이다. 그들의 눈에 서린 시퍼런 질투심을 캐시는 애써 못 본 척한다.







--------------------------------------------------------------


조슈아는 젊은 여자를 보며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24살. 자신은 그 나이에 에드워드를 처음 만났었다. 아득히 먼 옛날이다.   




--------------------------------------------------------------------------------

 여자의 눈은 반짝이다가도 이내 서서히 죽어가는 물웅덩이처럼 흐려지기도 한다. 그는 그 때의 그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조금 아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동정어린 심상에 불과하다. 조슈아가 죽을 때까지 인정할 수 없는 감정의 편린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손을 볼 때마다 조슈아는 일견의 연약함과 상반되는 단단함에 놀란다. 굳은 살이 여기저기 베여있는 손은 작지만 노련해 보인다. 그녀는 한 때 자신이 이것저것을 수리하는 취미가 있었다고 했다.

“지금도 수리하고 싶은 것이 있나.”

“그럼요. 뭐든지 고쳐보고 싶죠. 하지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게. 구해줄테니.”


조슈아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여자는 그것이 얼마나 큰 호의인지 알기에 놀란다. 기쁨을 억누르지 못해 새어나오는 여자의 웃음을 바라보며 조슈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남자는 유년기 이후로 그토록 순수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부족어로 ‘무지개’라는 단어를 처음 배웠을 때, 전쟁 전 물고기들의 모습이 실린 빛 바랜 화집을 할아버지의 책상 밑에서 찾았을 때, 그에게도 그처럼 소박한 행복의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말파이스 군단장이 된 지금 먼지 쌓인 채 그랜드 캐니언의 어딘가에 처박혀있었다. 그렇게 20년이 지났다.



----------------------------------------------------------------------------------------



아케이드는 의식을 잃은 배달부를 간호하는 일에 완전히 지쳤있었다. 시저 앞에서 말대꾸를 하며 그의 화를 돋군 건, 그래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 빌어먹을 전쟁광 반동 늙은이와 말상대를 했다간 자신도 어떻게 꼭지가 돌아버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데쓰클로 알파 메일을 상대로 총 한 자루 들고 돌진하는 건 문자 그대로 동료로서 용납할 수 없는 <미친 짓>이었다. 

아케이드는 묵시록의 추종자들의 매뉴얼을 다시 떠올리려 애썼다.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된 사람은…………….



같은 위험 상황에서도 일반인과 다르게 반응한다. 그것이 무감각함이든지, 극단적인 분노든지.

아케이드는 그 구절을 되뇌며 기절한 배달부에게 스팀팩을 투여했다. 


무너진 사람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아케이드 개넌은 배달부의 차가운 몸 위에 모포를 덮어주었다. 


reddite igitur quae sunt Caesaris Caesari et quae sunt Dei Deo.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 

------------------------


배달부는 꿈을 꾼다.

크고 마디가 단단한 손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꿈. 

저음의 목소리가 조용히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마치 기도문을 읊는듯 조심스럽고 경건한 리듬으로. 

그리고 자신도 그에 응답하려 한다. 그의 이름을 부르려고 한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흉부가 돌덩어리로 꽉 막힌 것처럼 숨소리 하나 내쉴 수가 없다. 그녀는 혼란스러워한다. 남자의 눈썹이 실망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배달부!"


"배달부!!"


격렬한 두통과 함께 배달부는 온 몸을 짓누르는 중력을 느낀다. 손을 뻗으려고 하자 남자의 손이 그녀의 손을 맞잡는다. 하지만 그 손이 아니다. 깔끔하고 정돈이 잘 되어있지만, 거칠었던 손이 아니다. 그녀가 갈망하던 손이 아니다. 그녀의 것보다 부드러운 남자의 손을 뿌리치며 그녀는 자신이 병동에 있음을 깨닫는다.

"여긴....."

"NCR 병동이야. 너 계속 조슈아란 이름을 울부짖던데, 도대체가....."

아케이드는 안경을 엄지와 검지로 들어 올린다. 그가 당황하면 나오는 버릇이다. 

"................."

"또, 또. '너는 몰라도 되니까 괜찮아'야? 배달부. 솔직하게 털어놓아야할건 털어놓으라고. 비밀들이 쌓여가면 쌓여갈 수록 그게 너를 좀먹을거야."

"조슈아...........그레이엄?"

"뭐라고?"

"아케이드, 비밀이 아니라 진짜 모르겠어. 내 뇌의 일부분이 고장난 것같아.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끔찍한 잘못을 저지른 것같아. "

"잘못이라니, 잘못이라고 해도 이유가 있었겠지. 너는 해야할 일을 했던 것이었을 거야."

"아냐.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찾아야겠어. 조슈아 그레이엄이란 사람을."

그럼 플래티넘 칩은 어쩌고? 오메르타 갱들과 위대한 칸 녀석들이 시저의 군단과.......... 항변하려던 아케이드는 배달부의 얼굴을 보고 그 어떠한 설득도 필요없다는 것을 직감한다.


아케이드는 기시감을 느낀다. 기어코 베니와 하룻밤을 보내겠다며 탑스 카지노 13층으로 올라가던 배달부의 표정을 기억해낸다. 도대체 그는 헤테로섹슈얼 남자들의 멍청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 봐도 배달부는 섹스를 하러가는게 아니라 죽이러 가는거였다고. 아니 그 두 가지를 도통 구분하지 못하는 건가? 성욕과 살의를 분간해내지 못하는 남정네들의 멍청함을 개탄하는 것도 잠시, 그는 지금의 배달부의 얼굴이야말로 굳건한 결의의 산물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했다.


배달부는 참회를 원하는 것일까, 복수는 원하는 것일까. 혹은 둘 다 일까? 

안타깝게도 그것까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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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답해라. 누가 보냈나.

-………………….

-대답.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몸을 울렸다. 캐시는 죽음이 자신의 목덜미 뒤에서 속삭이는 것을 느끼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손의 통각은 격렬하다 못해 감각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공포가 통증을 압도하고도 남아 비명 하나 지를 수 없었다. 군단장이 자신 앞에 서있었다. 남자의 턱은 긴장과 분노로 굳어있었고 눈은 형형히 빛났다. 자세는 곧았고 말투에는 위엄이 서려있었다. 그는 정말 소문 그대로의 남자였다. 그녀가 보기에 군단원들은 대개 소문으로 허영을 채우는 족속들이었다. 소문이 이름이 되고 그 이름이 자기 자신을 존재케 해준다고 믿으며, 자신을 실제 가치 이상으로 추켜세우곤 했다. 하지만 말파이스 군단장은 이름 그대로 행동하고 군림했다.

“나를 깨끗이 죽여줄 거라고 생각했어.”

“……….”

“ 당신을 증오해.”

고귀해서, 아니 고상한 척해서 더욱 증오스러운 심정을 남자는 이해할 수 있을까? 증조부 때부터 살아온 건라이트의 2층집을 불태우고 매그너스를 십자가에 못 박은 건 분명 다른 이들이었다. 울페스 인컬타, 시세로, 퀸투스, 가이우스, 루두스. 캐시는 그들의 이름과 면면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죽이고 싶었던 건 언제나 말파이스였고 캐시는 그 이유를 군단장의 캠프에서 노동하며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더러운 일에 절대 손대지 않는 말파이스, 품위 있는 말과 행동을 유지하는 군단장, 전장에서 제일 선두에 서며 가장 많은 적을 죽이고 돌아오는 불사신 같은 남자. 시저가 교활한 뱀이라면 남자는 번개같았다. 번개는 자신이 임한 곳에 남지 않고 사라진다. 하지만 캐시는 멍청이가 아니었고, 불타는 건라이트는 그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존재함으로써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결과. 화학반응식처럼 남자가 지나간 곳에는 불과 재, 십자가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캐시는 깨달았고 그의 위험한 춤을 멈춰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말파이스 군단장은 총구를 겨누던 손을 내리며 숨을 내쉬었다. 깊고 낮은 한숨이었다. 그는 귀찮다는 듯이 총으로 막사 입구를 가리켰다.

“나가라.”

“…………”

“나가. 여기서.”

말파이스는 여자가 원하는 죽음을 선물해줄 의사가 없었다. 그렇다고 여자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굳이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그런 취미는 없었다.)

 ‘오래 못버티겠군.’

말파이스는 그렇지 않아도 굉장히 고된 하루를 보냈고-애리조나 점령을 마무리하는 데에는 상상 이상으로 공이 많이 들었다-막사 안에서까지 피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자연의 순리처럼 군단이 그녀를 부술 것이다. 여자가 막사 밖으로 기어나가자 그는 총을 품 안에 넣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런 식의 자비가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인간성을 보존해주리라는 얄팍한 믿음을 가진 채로.




------------------------

7.


"난 네가 말수가 많은건지 적은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아케이드가 안경을 조심스럽게 올리며 배달부에게 말했다. 배달부는 핍보이로 지도를 확인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렉스를 쓰다듬고 있는 중이었다. 

"글쎄. 나도 내 성격을 모르겠어. 어쩌면 렉스랑 나랑 처지가 비슷한지도. 뇌에 가해진 충격으로 우리 둘다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된거야. 그렇지 렉스?"

"조화와 균형을 찾아가는 단계일 수도 있지."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마운데."

아케이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남자와 배달부는 의외로 말이 잘 통하는 편이었다. 시시콜콜한 과거의 개인사보다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점이 비슷해서일지도 몰랐다. 서로의 과거사에 천착하지 않는 대신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아케이드는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모든 것이 아케이드가 흡족한 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아케이드, 라틴어는 어디서 배운거야?"

"전쟁 전 교과서에서? 묵시록의 추종자들에게는 책이야말로 넘쳐나는 자원이거든. 별별 책이 다 있지.  시간 때우기에는 라틴어만한 것이 없어. 원한다면 내가 가르쳐-"

"아니. 부탁 하나 할게. 내 앞에선 라틴어 쓰지 말아줘."


아케이드는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 후로 한동안 어색했었지.' 하지만 그런 사소한 충돌들을 제외하면 배달부는 유쾌한 동료였다. 의지보다는 서로 이용할 수 있고, 거기에 아무런 유감이 없는 동료. 아케이드는 그 사실에 다시 한번 만족했다. 


캐시는 굴욕감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도망쳤다. 그 곳에서 노예처럼 굴종하는 자세로 기어나갔다. 그녀의 형제 자매들은 군단에 맞서 끝까지 건라이트를 위해 싸웠다. 아버지는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 순간까지 군단을 저주했고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딸인 자신은 절호의 기회 앞에서 총 한번 제대로 쏘지 못하고 나동그라졌다. 그녀는 수치심을 느꼈다.  


“넌 총 쏘는 법도 배워야해.”

“황무지에선 총기 정도는 다룰 줄 알아야하는 법이다. 요녀석아.”


매그너스의 말버릇을 떠올리면서 캐시는 숨 죽여 울었다. 이미 200년전에 죽어버린 문명을 탓할 수는 없었다. 도망치지 않은 매그너스를 탓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십자가에 박힐 용기가 없어 삶을 이어가고 있는 자신 때문이었다.  


말파이스의 싸늘한 얼굴을 떠올리며 그녀는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살의를 느낄 기운조차 없었다. 그녀는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황무지의 분노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그런 흉흉한 눈빛을 할 터였다. 나는 절대로 그를 쓰러뜨릴 수 없다. 아니, 살아있는 그 누구도 그를 진정으로 죽일 수 없을 것이다. 그 역시 알고 있으리라. 


그녀는 뜬 눈으로 밤을 샜다.




캐시는 그 뒤로 종종 말파이스를 봤다. 주로 부관들에게 둘러 싸여서 지도를 하고 있거나 명령을 하달하는 그를 말이다. 그의 균형 잡힌 얼굴에서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필요할 때만 동요하고 그 동요는 대부분 폭력을 수반하곤 했다. 말파이스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마다 그녀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절대로 눈에 띄지 않게 몸가짐을 주의했다. 


하지만 운명은 항상 가혹하다. 신은 피조물이 하찮을수록 더욱 더 잔인하게 구는 법이기 때문에.


“힐링 파우더 없어?”

“마리우스가 죽었어! 군단장님은! ”

“의식 불명입니다!”

“망할 그 의사 나부랭이 노예놈은 어디로 간거야!”

“서쪽 캠프로 이틀 전에 이동시켰습니다!”

“씨발. 핀드들이 여기까지 기습해올 줄이야.”

 



아닌 밤 중에 군단병들이 노예 막사에 들이닥쳤다. 섹스를 원하는 것 같진 않았다. 목소리에는 갈급함이 서려있었다.


“힐링 파우더나 스팀팩 다룰 줄 아는 사람, 당장 밖으로 나와라!”


노예들이 머뭇거리자 군단병은 악에 받친 소리를 지르며 총을 꺼냈다.


“다 쏴서 죽여버리기 전에 당장 의료막사로 이동해라!!”


노예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중요한 인물이 다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일개 군단병의 죽음은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으니 소요를 일으킬 정도면 꽤나 거물의 부상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잘못되면 책임자는 반드시 십자가로 대가를 치를 터였다. 군단병들의 의료지식이 일천하기도 하지만 기실 그 누구도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 노예 막사에까지 발걸음을 한 것을, 노예들은 기민하게 눈치챘다.



“너!”


군단병은 캐시를 가리켰다.


“힐링파우더 노예놈이랑 같이 일했었지? 따라와!”


‘나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라는 안도하는 눈길들을 받으며 캐시는 막사 밖으로 걸어나갔다. 군단병을 따라갈수록 캐시는 목이 졸리는 기분을 느꼈다. 몇 주전에 이루어졌어야 할 심판이 드디어 성사된다는 예감을 강하게 받으며 그녀는 한발자국씩 걸어나갔다. 추운 겨울에 맨발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의료막사를 향할수록 신음소리와 비명, 피 냄새와 고름 냄새가 공기를 메웠다. 건라이트 마지막 날의 냄새였다.


“군단장님이 핀드들의 기습을 받고 의식을 잃으셨다.”


“원래는 스팀팩을 사용하지 않지만, 이번 경우에 한해서는 사용을 허락한다.”


부관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막사 안을 바라보자 누워있는 형체가 뚜렷하게 그녀의 망막으로 들어왔다.



말파이스 군단장이었다.



말파이스의 창백한 얼굴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핀드들의 피인지 그의 피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자명했다. 위엄있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가 누워있었다.


캐시는 부상자들을 다뤄본 적이 있다. 레이더들에게 습격 당한 마을 주민들을 돌보느라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면서 마을 의사인 우서 영감-우서 영감도 십자가에 매달렸다, 의사를 죽이다니 군단은 머저리임에 분명했다-을 보조했던 것이다. 그녀가 주로 한 것은 상처를 닦고 붕대를 새로 감아주는 일이었지만 우서는 그런 일이야말로 회복에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한바 있었다.



그녀가 누워있는 군단장에게 가까이 가자 부관들이 시선을 피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 죽음에 내 책임은 없어. 라는 제스처였다.

말파이스 군단장님. 당신의 부하들의 충성심은 이 정도네요. 캐시는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그의목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뜨거운 피가 그녀의 미지근한 손에 묻었고 그녀는 이상하게 자신이 말파이스를 죽이는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차라리 그런 상황이었으면 좋았으리라. 그녀는 자조했다.

나는 그를 살리려고 하고 있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흘린 피의 양이 문제였다. 스팀팩을 사용하는 것을 극구 거부하는 군단의 문화 때문에 후속 조치가 늦었던 것이다. 그녀는 지체 없이 소독한 주사 바늘을 스팀팩에 연결해 말파이스의 흉부에 꽂았다. 스팀팩 투여와 함께 그의 몸이 움찔거리자 부관들도 동요했다. 그 다음 그녀는 환자의 옷을 찢은 후 소독한 상처 위에 붕대를 감았다.

한치도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


조슈아 그레이엄은 매일 아침 붕대를 새로 감는다. 붕대를 새로 감을 때마다 그는 그랜드 캐니언에서 곤두박질 치는 경험을 한다. 불에 휩싸인채 떨어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길을 느낀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붕대의 더러운 모습을 자신의 과거와 결부시키는 것을 즐긴다. 악업과 자기기만이 서로 맞물려 긴 또아리를 튼 형국을 보며 조소한다.



말파이스는 죽었고 그 자리에서 조슈아 그레이엄이 다시 일어섰다.





--------------------------------------------------------------------------------------



배달부는 동이 트기 전, 잠에서 깨어났다. 아케이드와 렉스는 옆방에서 자고 있을 터였다. 굿스프링스에서 일어선지 1년이 지났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겨울에 일어난 그녀는, 다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었다. 미스터 뉴베가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특집쇼를 들으며 배달부는 미소를 지었다. 배달부는 라디오를 끈 후 핍보이에 자신의 상태를 짤막하게 녹음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익숙한 45구경 자동권총을 면밀하게 살폈다. 권총 옆면에 새겨진 장식과 이니셜 J.G를 더듬으며 배달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4년 전의 일들이 마치 삭제된 홀로테잎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존재한 감각조차 없으니 아쉬울 것도 없었다만... 이렇게 과거의 표식과 마주칠 때마다 궁금한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 권총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J.G… 제이슨 그린? 존 그로스먼? 가능한 모든 영어 이름을 상상해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내일이면 시저의 캠프로 간다.

배달부는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어쩐지 몸이 뻣뻣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군단의 악행은 모하비에서 유명했고 자신이 군단과 관련된 배송을 피해왔던 이유가 거기에 있을 터였다. 아무리 군단이 배달부들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서운 건 무서운 것이었고 배달부는 자신이 노예들의 광경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은연 중에 알고 있었다. 굿스프링스에서 나오자마자 마주쳤던 닙튼의 끔찍한 광경은 그녀의 짐작에 더욱 더 확신을 실어주었다. 닙튼의 광경은 떠올리기만 해도 시체 썩는 냄새를 불러일으켰고 냄새는 이미지의 연쇄로 이어졌다. 타오르는 일몰, 십자가에 못박힌 남자. 불에 타는 마을. 불,





그녀의 눈에서 이유모를 미지근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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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1.

복수는 나의 것 1.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니, 내가 갚는다. 원수들이 넘어질 때가 곧 온다. 재난의 날이 가깝고, 멸망의 때가 그들에게 곧 덮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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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갗을 태우다 못해 증발시키는 불과  압도적인 중력을 느끼며 조슈아 그레이엄은 무저갱 속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모든 의식이 창세 이전 태고의 어둠으로 뒤덮이기 직전, 그가 떠올린 것은 우습게도 군단이나 베드로의 십자가도 아닌 여자의 입이었다. 그리고 그 입 속에서 흘러나왔던 허스키한 목소리. 운율 있는 저음의 목소리를 생각했다.

“말파이스, 잘 자요.”



1.


평소에 굳게 다물려 있는 여자의 입은 조슈아의 앞에서만 열리곤 했다. 무엇을 먹건, 말하건간에 오로지 군단장의 앞에서만 존재감을 드러냈던 것이다.

처음 마주친 그 때에도 그녀는 입을 다문 채였다. 건사이트를 정복하고 지역 유지- 이름이 매그너스였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를 처형한 날이었다. 그녀는 여느 포로와 마찬가지로 밧줄에 묶인 채 가축처럼 끌려가고 있었다. 무감하게 그 풍경을 바라보던 조슈아는 여자의 수심에 잠긴 얼굴을 잠시 눈에 담았다. 황무지에서는 드문 깨끗한 얼굴이 침통함으로 시퍼렇게 질려있었다. 비교적 깔끔한 옷이 진흙에 묻어 넝마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눈을 뜨는 것을 한사코 거부한 채였다. 

‘오래 못 버티겠군.’ 비루하기 짝이 없는 피정복자의 모습을 관상하던 남자는 한달 뒤에 그녀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2.


차가운 금속이 조슈아 그레이엄의 관자놀이에 눌려졌을 때, 그는 가까스로 수마에서 깨어나 자신의 단잠을 방해하는 침입자를 파악해보려했다. 총기는 자신이 곁에 두는 콜트 M1911.  총신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으로 봐서 절대로 숙련된 암살자는 아니었다. 애초에 관자놀이에 곧장 총구를 들이미는 것만으로도 얼치기라는 것을 족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저런 얼간이가 어떻게 경비를 뚫고 막사 안까지 들어왔는지 황당할 따름이었다. ‘내일 아침에 보초들을 족쳐야겠군.’ 마음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몰아 쉬며 조슈아는 망설임 없이 몸을 곧추 세워 침입자를 눕혔다.

침입자는 여자였다. 그녀는 미처 총구를 당기지도 못한 채 널부러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여자의 손에서 떨어져나간 총기를 발로 차 멀리 떨어뜨린 뒤, 조슈아는 다른 발로 더듬더듬 총을 찾는 여자의 손을 짓밟았다. 우지끈,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여자는 비명 하나 지르지 않은 채로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여자가 짓밟힌 손을 감싸 쥐며 웅크리고 있는 동안 조슈아는, 아니 말파이스 군단장은 성큼성큼 총이 떨어진 곳까지 걸어간 후 그것을 주워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쳤다. 모든 움직임이 막힘 없이 하나의 동작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3.



그녀가 일어난 곳은 낯선 방 안이었다. 천장에는 곰팡이가 핀 나무판자가 덧대어져 있었고 그녀가 몸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침대-라기보다는 판상-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엉거주춤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하자 절로 신음이 나왔다. 머릿골이 안에서 잘게 쪼개지는 격통도 문제였지만 팔 다리가 뜻하는 바대로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깨어났나? 좀 어떤가.”

그녀의 시야 너머로 깡마른 노인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일이 이렇게 꼬여서 유감이야.”

“이 게임은 처음부터 조작되어있었어.”

그녀가 머리를 부여잡고 웅크리자 노인은 그녀의 상체를 부축하고 물을 먹였다. 그녀가 진정하자 노인은 안심하라는 듯이 차분하게 물러선 뒤 말을 이어갔다.

갱단 무리에게 습격 당해 머리에 총알을 맞고 묻힌 것.

빅터라는 시큐리트론에 의해 구조되어 의사인 노인의 치료를 받은 것.

의사의 차분한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듣자 희끄무레한 의식의 너머로 기억들이 현상된 사진처럼 지나갔다. 여자는 자신이 배달부라는 것을 기억했다. 모하비 사막을 횡단하며 소포와 중요한 물건, 때로는 기밀 문서 따위를 전달하는 배달부. 낮이면 일을 하고, 밤이면 무너져 내려가는 호텔 방에서 총기를 손질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던 사람.

여자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고개를 들자, 미첼-그것이 의사의 이름이었다-은 황급히 건너편의 탁상위에 있는 옷과 총을 건넸다.

“이 총이 자네의 품 속에 있었네.

45구경 자동권총을 손안에 쥐자 익숙한 무게감과 부피가 느껴졌다. 익숙함으로 인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한사코 거부했지만 미첼은 의사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 해야 한다며 이것저것을 테스트했다. 시력 검사부터 연상 질문-로르샤흐?라는 이름의 것이었다-까지 방대한 양의 대질심문(?)이 끝나자 배달부는 머리 위부터 발끝까지 긴장이 풀리며 녹초가 되었다.

“아무래도 그 총알이 자네 머리를 좋게 손봐준 모양이구먼.”

배달부의 긴장을 풀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의사는 흰소리를 하며 차트를 채워나갔다.

“걱정되는 건…역시 4년 전의 기억이 없다는 것이겠고…하지만 너무 염려하지 말게. 부분적 건망의 경우에는 더러 바깥의 자극이나 우연한 계기를 통해 기억을 회복할 때가 많다네. 일단 굿스프링스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 어떻겠나? 여기 사람들도 마침 일손을 필요로 하고 말이야.”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할 일이 있어요.”

이 문제적인 배달을 반드시 끝내야 한다는 예감이 그녀의 척추를 타고 흘러내려갔다. 그리고 그 남자, 체크 무늬 양복을 입은 기억 속의 남자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을 거라는 추측에 가까운 확신도 있었다. 적어도 그 칩의 수령인에 대해서는 무언가 할 말이 있겠지. 배달부는 듬성듬성 빠져있는 기억의 조각들을 짜맞출 시간조차 없는 현실을 쓰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보통 자신에게 맡겨지는 일들은 기한이 짧았다. 그리고 그 기한이 넘어가면 대개 누군가가 죽거나 다쳤다. 당연히 그 누군가에는 배달부가 항상 포함되었고. 그리고 간단하게 붙이자면, 배달부는 더 이상 다치고 싶지 않았다.

배달부는 연민과 걱정이 섞인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는 의사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황량한 모하비 사막으로 걸어나갔다.

 4.

조슈아 그레이엄은 독실한 사람이 아니다. 머나먼 기억 속의 자신은 어느 정도 그랬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조슈아는 다시는 그처럼 맹목적인 자세로 신을 믿지 못할 것이다. 피 묻은두 손으로 기도를 올리는 것에 거북함을 느껴서 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신을 안다고 해도 그를 결코 좋아할 수 없음을 이미 진즉에깨달았다. 에드워드, 아니 시저는 간단하게 그 복잡다단한 감정을 정리한 바 있다.


“동족 혐오지. “


조슈아, 아니 말파이스는 그 말에 미약한 저항감을 느꼈지만 결국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구약의 분노한 신, 아버지, 이교도들에게 불벼락을 내리고 유대 민족에게 만나를 약속하는 이율배반적인 야누스의 모습. 그 속에서 자신의 가장 최악의 일면을 발견하곤 한다.

하지만 아무리 성경을 비웃어보려 해도 자신의 침대에 누워 촛불에 비친 책을 읽는 여자를 보면 말파이스는, 아니 조슈아 그레이엄은 어렸을 적 읽었던 구약의 우화를 생각할 도리밖에 없다.

“힘이 강한 삼손은 자는 사이에 데릴라에게 머리카락을 베였답니다.”

그 당시에는 비웃기기만 했던 우화가 통각과 함께 머릿속에 들이닥친다.

여자는 전쟁 전 잡지를 읽고 있다. 당시 유행했던 헤어스타일과 가장 사랑 받는 노래 차트를 유심히 살펴보며 그 시절을 더듬고 있다. 여자의 집중은 말파이스가 그녀 지근 거리에 다가가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말파이스 군단장님.”

“조슈아.”

“조슈아- 왔어요?”


여자는 잡지를 침대 구석에 끼워둔 채 엷은 미소를 짓는다. 상체를 돌려 제법 여유로워진 자세를 과시한다. 조슈아가 침대 위로 올라가자 여자는 두 팔을 벌려 그의 지친 어깨를 껴안는다.


여자는 조슈아의 어깻죽지에 고개를 묻으며 피 냄새를 맡는다. 남자가 오늘 수확한 목숨과 태운 벌판을 생각하며 그의 턱선을 따라 입맞춘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남자의 상체가 풀어지고 남자의 하관에 미소가 깃드는 것을 기민하게 살핀다.


“오늘 힘들었나 봐요?”

“파우더 갱들도 머리를 쓴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우리측이 방심한 거지만.”


남자는 여자 앞에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데 한층 너그러워진다. 스스로에게도 용납하지 않는 결점들을 그녀 앞에서만 잠시 내보인다. 잠시지만.


“퀸투스가 죽었어.”


아무렇지 않게 툭 말을 던지지만 남자가 부하의 죽음을 뼈아프게 느끼고 있다는 걸 여자도 감지한다. 여자는 다만 속으로 비웃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쓸 뿐이다. 군단병들이 하나 둘 쓰러질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남자가 알아차리지 않길 기도할 뿐이다. 다행히도 남자는 너무 지친 나머지 여자의 냉소를 눈치채지 못한다.   


남자는 SWAT 조끼를 벗어서 걸어두고 여자와의 입맞춤을 계속한다. 스스로를 합리화하는데도 지친 나머지 몇 달 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여자와 같은 침대를 쓰는 작금의 상황도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방아쇠를 당기기 전 여자에게 질문을 한 것이 실수였다면 실수였다. 하지만 조슈아 그레이엄은 신이 아니다. 가끔은 자비를 베풀어도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아주 가끔은.



5.

여자는, 아니 캐시 베넷은 스스로를 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온 건라이트 지역 주민들은 그녀를 의뭉스럽다고 여긴다. 캐시는 그것이 불만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런 평판에 개의치 않으려고 한다. 전쟁 전 만화책들을 지독하게 좋아하고 (실버 슈라우드 시리즈에 거의 미쳐있다고 보면 된다) 라디오 고치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이 목축 일을 하는 이들에게 친근하게 보일 리 없지 않은가(물론 그녀도 일손은 돕는다). 요새 그녀가 관심 있는 것은 인공 위성의 전파를 찾아내는 것이다. 황량한 지구를 맴도는 신비한 기계 별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쟁 전 사이언스-걸 매거진에서 발견한 이후로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것들과 교신해야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물론 여즉 신호를 잡지 못한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애리조나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와 기술에는 한계가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성과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디사이저식 단파 수신기를 고철 운반 카라반에서 찾은 이후로 동부의 단파 방송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대부분 브라더 오브 스틸의 홍보용 방송이나 각 단체들의 맹아리 없는 선전이 전부였지만 개중에서도 클래식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정말이지 즐거운 일이었다. 정말 클래식만 나오는 방송이라 어디에서 송출되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캐시에게는 아무렴 좋았다. 제아무리 좋은 핍보이라도 이런 기능은 없을 거라 생각하니 캐시는 자신의 수제 라디오에 절로 자부심이 생겼다.


묵시록의 추종자들이라면 이런 류의 기술에는 익숙할지 모른다. 캐시는 언젠가 그들에게 라디오를 들고 가 방법을 찾아갈 요량이다. 아버지가 허락만 하면 말이다. 캐시의 아비인 매그너스는 일가의 완고함을 그대로 받은 초로의 남자로 건라이트 최대의 래드스태그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자신의 막내 딸이 고철덩어리에 집착하는 걸 못마땅히 여기며 그럴 시간에 울타리나 제대로 손보라고 타박하는 인물이지만 그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스터 핸디의 잔해를 어렵게 주워다 줬더니 그걸 다시 구동시키기는커녕 조각조각 분해를 해버린 건 확실히 누가 봐도 너무 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딸의 몽상가적 기질이 절대로 황무지에선 조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매그너스는 그녀를 볼 때마다 비장이 타 들어가는 느낌이다. 게다가 북쪽에서는 자꾸 불길한 소식들만 들려왔다. 레이더 무리들도 아닌 조직된 <군단>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은 세월의 풍파를 겪을 대로 겪은 그조차도 움츠려 들게 한다. 


세금이라면 얼마든지 낼 용의가 있다. 하지만 자신의 피같은 땅을 빼앗는 것은 매그너스의 사전에는 없다.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묻힌 곳이고, 방사능에 더럽혀졌을 지언정 뿌린대로 정직하게 되돌려주는 땅이었다. 그런 땅을, 이방인에게 내준다고? 카이사르인지 캐사르인지 빌어먹을 자식의 머릿통에 샷건 한발이라도 날려줄 요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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