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복수는 나의 것 7-2

블랑시 2017. 12. 10. 19:27




분필자국따라는 굉장히 난감한 상황에 처 해있었다. 자신이 힘들게 애써서 데려온 배달부와 조슈아의 사이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둘이 구면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 참 멋지고 신기한 일이네요!”라고 탄성을 내뱉은 분필은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을, 둘의 냉랭한 눈빛 교환으로 알아차렸다. 배달부는 분필이 있건 말건, 주위에 부족민들이 듣건 말건 조슈아를 향해 날 선 말들을 속사포같이 내뱉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당신이랑 몇 년간 눈맞고 배 맞은 사이라고 한다 쳐. 하지만 동시에 당신이 내 원수라는 사실도 받아들이라고? 허풍이 지나치시네. 내가 아무리 내 머리에 총을 쏜 자식을 유혹했다지만 진짜로-”

“누가 그랬나.”

“뭐?”

“누가 네 머리에 총을 쐈냐고 물었다.”

조슈아가 엄숙하고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추궁 하자 배달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톱스 카지노의 베니. 그 놈이 내 머리에 총을 쐈어. 그래서 기억을 잃은 거고. 대답이 됐어?”

“그 놈은 살아있나.”

“배때지에 칼을 손수 쑤셔 박았으니, 살아있을 턱이 없지.”

분필자국따라는 정말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저리 무서운 사람이 다 있지? 자기가 데려온 사람은 보통 인물이 아닌 것같았다. 하얀다리 부족 잔당들을 절멸시킨 건 요행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참의 어색한 침묵이 지나자 조슈아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


“내가 … 왜?”


“다 말하지 않았나? 난 네 원수라고. 일전에 넌 날 죽이려고 했었지. 그걸 마무리지어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니, 내가 갚는다. 원수들이 넘어질 때가 곧 온다. 그가 엄숙하게 성경의 한 구절을 암송하자, 동굴 안의 부족민들이 술렁거렸다. 자신들의 부족장이 손수 죄 사함을 요청하고 있었다. 저 낯선 여자한테서! 



배달부는 이 모든 상황에 현기증이 난다는 듯이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가 안주머니 속의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그녀는 긴 한숨과 함께 한 모금을 내쉰 뒤에야 입을 열었다.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만이 동굴 안에 울렸다.




“내가 여기서 당신을 죽인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절대 모하비로 돌아갈 수 없겠지. 여기 사람들이 이 곳에서 ‘신 놀이를 하고 있는’ 당신을 죽인 나를 도와줄 턱이 없고, 이대로 하얀다리 부족이 여길 공격할게 분명한데. 내가 왜 그런짓을 하겠어.”



조슈아의 침묵을 무언의 신호로 받아들인 그녀는 계속해서 가시 돋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슬프게도… 난 당신에게 어떠한 유감도 없어. 캐시 베넷은 이미 오래 전에 정말로 죽은 것 같거든. 그 긴 이야기를 듣고도 어떠한 감상도 떠오르지 않으니까 말이지.”



분필자국따라는 그 순간, 조슈아의 눈빛이 실망과 슬픔으로 굳어지는 것을 포착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마지막 비수를 꽂았다.


“혹여 내가 기억이 떠올라서 당신을 죽이고 싶어지면, 그 때는 생각해보겠지만…. 잠깐,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굳이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걸? 없어져서 잘됐지. Good riddance. 그런 기억이면 없는 게 나아.”


조슈아가 충격으로 굳어 있는걸 난생 처음 본 분필은-조슈아는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사색을 하건, 기도를 하건-, 담배를 발로 비벼 끈 배달부가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배달부가 분필의 어깨를 가볍게 툭,하고 쳤다.

“분필자국따라. 쉴 곳이나 잠 잘 곳 있어요?”

아까와는 딴판인 정중하고 예의 바른 목소리였다.

분필자국따라는 뒤통수에서 따갑게 느껴지는 조슈아 그레이엄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이방인에게 길을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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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부는 화가 났다. 정말이지, 분노가 치밀어서 온 뇌세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여행을 하던 와중에 하얀다리부족인가, 하얀어깨부족인가에게 습격을 당한 건, 그래 이미 고려했던 변수였다. 하지만 기껏 비장하게 기억을 찾아서 왔더니만, 유일한 정보원이라고 생각했던 조슈아 그레이엄이란 작자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내가 저 붕대 사나이랑 잤다고?’


원수라고도 했다. 하지만 배달부는 자신이 원수랑 진짜로 잘 정도로 그토록 분별력이 없을 거라곤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남자가 무엇을 속이거나 숨기는 것 같진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그는 지나치게 차분하고 막힘 없이 전후 사정을 설명했고-마치 그 순간을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사람인 것마냥-, 그의 목소리에서는 시종일관 모종의 진실성이 느껴졌다.


‘속이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어….’


배달부는 남자의 눈빛과 말투에서, 그리고 행동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기시감은 울화와 함께 그녀의 심사를 괴롭혔고, 배달부는 눈앞에서 고고하게 성경을 읊는 남자를 흠씬 두들겨 패고 싶은 욕망을 참느라 고생해야만 했다. 베니에게서 느꼈던 살의와는 구분되는 충동이었다.

 ‘뭐… 내가 죽이기엔 너무 맥 빠지는 상대인걸.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아니 불쌍하다니, 정신차려라!’


배달부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울분을, 그리고 그 과거에 묻어있는 비극적 색채에 대한 울분을 자꾸만 남자에게 풀고 싶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화를 내건, 욕설을 내뱉건 남자의 말은 아마 사실이리라.

그러나 동시에 배달부는 생각했다.


 ‘이미 나는 내가 누구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 ‘

그녀는 결심했다.

‘됐어. 이 곳을 당장 뜨자. 저 조슈아인지, 불탄 남자인지 뭔지는 대자연 속에서 하느님 말씀이나 전파하면서 살라고 하고. 난 다시 모하비로 돌아가야겠어. 아케이드의 말이 백 번 옳았지. 난 아무런 소득이 없는 헛된 짓을 한 거야.’


핸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 끔찍한 일을 겪은 존재는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을 거라고. 그 말은 지혜의 충고임에 틀림 없었다. 

배달부의 머리가 뒤죽박죽 엉켜 들어갔다. 그녀는 엉킨 실타래처럼 엉망이 된 기억의 무덤을 애써 마음 한 켠으로 치운 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자이온을 탈출해야 한다.

붕대-성경-사나이가 부족민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은 건 그나마 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다행이었다. 하루빨리 돌아갈 날을 고대하며-그리하여 이 번다한 상황에서 탈출하기를 기원하며- 그녀는 몽롱한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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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꿈을 꾸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자의 진술이 그녀의 머릿속에 괴기스러운 형태로 재현되었다. 불타는 자이온, 붕대에 둘둘 말린 채 춤을 추고 있는 자신과 얼굴 없는 남자. 실버슈라우드의 목소리로 읊어지는 성경 구절들. 그리고…………..

슬픈 건지, 불쾌한 건지, 하다 못해 그리운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배달부는 몸을 뒤척였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인기척이 다가왔다. 분필자국따라였다.


“어……저………..조슈아가……….. 당신을…….찾아요……엄…………”



둘 사이에 끼게 되어서 정말 유감이고 난감하다는 듯이 분필자국따라는 모자에 달린 깃털을 매만지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배달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분필은 위로하려는 듯 그녀에게 계속해서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많이 놀랬죠? 조슈아는 어제 잠을 안자고 계속 총을 만지던데..아, 조슈아 이야기는 하면 안 되는데,,, 가 아니고- 그게…아침으로는 뭘 먹고 싶으세요? 조슈아를 만나는 동안 준비해 놓을게요. 여기는 그 쪽이 사는 곳이랑은 다른걸 먹지만 그래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


배달부가 애써 미소 지으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는 연갈색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한다음 자신의 핍보이를 확인했다. 현지 기준 오전 9시 56분.  스스로 민망할 정도로 오래 잤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는 재빨리 옷 매무새를  정리했다.

“하루 빨리 이곳에서 나가야 될 것 같네요. 그 과정에서 분필씨네 부족에게 신세를 지게 된 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요. 어떻게든 이 은혜는 갚을게요.”


“조슈아가 그냥 하라고-“


“그 사람 이야기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배달부가 차가운 눈빛을 쏘며 분필의 말을 끊었다.


분필은 앞으로 더 험난한 여정이 자신 앞에 펼쳐져 있음을 깨달았다.